[탐방] 미국 동남부 아시아 미술의 중심지, 사무엘 P. 한 뮤지엄을 가다
▲ 플로리다 게인스빌 소재 플로리다 대학의 사무엘 P. 한 뮤지엄(Samuel P. Harn Museum) ⓒ 최정희 |
▲ 한국관 전시실이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리는 설명판. ⓒ 최정희 |
(게인스빌 =코리아위클리) 최정희 기자 = 종종 보석은 평범해 보이거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발견된다. 평범한 동네 야산에서 희귀 금속 광맥이 발견되거나 황량한 벌판이 원유의 보고로 드러나게 된다.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워싱턴 DC의 내셔널 뮤지엄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예술품을 플로리다 레이크메리 중학교 도서관의 전시실 한켠에서 접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게인스빌 소재 플로리다 대학(University of Florida)의 사무엘 P. 한 뮤지엄(Samuel P. Harn Museum, 이하 한 뮤지엄)은 한인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할 특별한 예술 박물관이다. 이곳 아시안 전시실은 미국 동남부 지역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미술품 보존의 중심 센터일 뿐 아니라, 전시실 내 유일한 별실은 오직 한국 유물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1990년에 문을 연 사무엘 한 뮤지엄은 연차적으로 확대를 꾀해 왔고, 지금은 현대 미술관, 파빌리온, 전시실, 클래스 룸, 카페 등으로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2012년에는 별도의 아시안 전시실을 마련함으로써 기존의 전시 공간은 세배로 늘어났다. 바로 이 공간 안에 한국 전시실이 별실로 들어 앉아 있다.
밴 플리트 전 유엔군 사령관이 수집한 유물 다수 소장
▲ 한국전 참전 전 유엔군 사령관 벤 플리트 장군 |
904평방 피트 규모의 한국 전시실은 한국문화재청과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이뤄졌지만, 이처럼 한국 유물들이 특별하게 전시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한국전에 참여했던 유명한 장군 덕분이기도 하다.
제임스 올워드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1892년 3월 19일 ~ 1992년 9월 23일) 장군은 한국전 당시 미국 제8군 사령관으로 유엔군 사령관을 겸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깊은 그는 재임 기간 중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설립과 건물을 신축하는 등 대한민국 육군의 전력 강화에 기여했다. 현재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는 밴 플리트 장군의 동상이 서 있고, 육사 박물관에는 한국 육군 사관학교의 발전을 바란다는 장군의 개인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미술 수집에 취미가 있어 희귀한 아시안 예술품들을 소장했던 밴 플리트 장군은 자신이 수집한 유물들을 1988년에 플로리다 대학에 기증했다. 전시실에 있는 한국 유물의 대부분은 밴 플리트 장군이 기증한 것이며, 이중에는 진귀한 조선시대 청화백자와 김홍도(1745-c.1806)의 희귀 회화인 ‘매사냥’, 그리고 장승업(1843-1897)과 김은호(1892-1979) 작가의 걸작이 포함돼 있다
뉴저지주에서 태어난 밴 플리트 장군은 성장기를 플로리다에서 보냈고, 플로리다대학 ROTC 장교 및 풋볼 감독(1923-1924)을 역임하는 등 플로리다와 연관이 깊다. 플로리다 대학은 미 공군, 육군 및 해군 ROTC 프로그램이 있는 군대 과학 건물을 밴 플리트 홀로 명명했다. 플로리다 역사가들은 밴 플리트를 20 세기의 가장 중요한 플로리다 주민 5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는다.
밴 플리트는 1992년 9월 23일 플로리다 포크 시티 근교에 있는 목장에서 잠을 자다 사망했다. 100 번째 생일 축하 몇 달 후였다. 사망 당시 미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장성이었던 그는 알링턴 국립 묘지 7구역에 안장되었다. 탬파와 올랜도를 가로지르는 주간 고속도로 I-4를 지나치다보면 제임스 밴 플리트 스테이트 트레일(The James A. Van Fleet State Trail) 표지판을 목격할 수 있다.
▲ 탬파와 올랜도를 가로지르는 주간 고속도로 I-4에서 볼 수 있는 제임스 밴 플리트 스테이트 트레일(The James A. Van Fleet State Trail) 표지판. ⓒ 최정희 |
목제도금보살좌상, 왜 화제가 됐나
밴 플리트 장군의 기증품을 포함한 사무엘 한 뮤지엄의 한국 전시실 예술품들은 서기 1, 2세기부터 20세기에 걸친 건축물, 청동 작품, 도자기 작품, 가구, 회화, 인쇄물, 병풍, 조각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17세기 목제도금보살좌상과 현대 작가의 민속 작품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모든 작품 중 방문객들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이 있다면 단연 목제도금보살좌상이라 할 수 있다.
전시실 중앙 은은한 조명 아래 투명한 유리관속에서 고고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는 목제도금보살좌상은 뮤지엄 차원에서도 화제가 된 예술품이다.
▲ 조선시대 목제도금보살좌상. ⓒ 최정희 |
2008년 봄 사무엘 한 뮤지엄은 마이클과 도나 싱어(Michael & Donna Singer) 부부가 기증한 매우 희귀한 유물을 소장하게된다. 높이 65cm의 조선시대 금박 보살좌상이다.
당시 사무엘 한 뮤지엄은 플로리다 대학의 디지털 라이브러리 센터(Digital Library Center, DLC)와 상호협력관계를 맺고 혁신적인 파일럿(선행 시험)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던 차였다. 프로젝트는 아프리카 구슬공예품 등 뮤지엄 소장품들을 직접 관람하는 것과 같은 가상의 경험을 온라인을 통해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직접 눈으로 관람할 때는 불가능한 소장품을 확대해 아주 작은 부분까지 확인하려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구슬공예품 프로젝트의 성공을 통해 유물 디지털화의 선구자로 나선 사무엘 한 뮤지엄은 한국 보살좌상의 디지털화에도 손을 뻗쳤다. 이는 좌상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채 내부에 있는 보존물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작품은 싱어 부부 이전의 소유자들이 별개로 분리했던 원본 목판 불경들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원래 이 불경들은 좌상 조각품 몸체 내부 공간에 들어 있었다. 원본 불경에는 검은 물감 한자로 쓰여진 연화경의 일부가 인쇄되어 있으며, 붉은 물감으로는 란자나 문자들이 인쇄돼 있다.
한 뮤지엄은 조각품 두상의 머리카락 묶음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두상 내부에 또다른 인쇄물이 들어있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뮤지엄은 조각품과 불경에 손상이 발생할 수 있음을 고려해 두상 내부에 보관된 인쇄물은 꺼내지 않기로 결정한다.
본래 조각품 두상에 손상을 대지 않는 한 내부에 추가적인 불경이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박물관 소장품 디지털화에 협력하고 있는 쉔즈 대학병원과 노스플로리다 리저널 메디컬 센터가 의학 연구용 디지털 이미징 기술을 적용해 두상 내부의 불경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 X-ray 이미지와 컴퓨터 컬러 단층촬영(CAT scan)은 조각품 두상 내부의 불경의 존재 뿐 아니라 목재 조각품 자체의 세부 사항을 드러냈다.
우선 목재도금보살좌상은 몸체가 하나의 덩어리이며 조각품의 손, 머리매듭, 얼굴, 귀, 좌대 부분은 각각 별도로 조각됐다. 이밖에 디지털 이미지는 조각품의 나뭇결, 나이테, 금속 못, 두상 안쪽, 머리매듭, 얼굴, 귀, 좌대 부분은 각각 별도의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목재 나뭇결의 성격, 나이테, 조각 부분을 결합하는 금속 못 등 이미지도 나타났다.
디지털 조사팀은 두상 속에 있는 불경 종이도 세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불상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손 부분을 제거한 뒤, 고해상도 디지털 카메라로 두상 내부를 살펴본 결과 종이는 하얗게 변색됐고, 붉은 물감으로 압인되어 있음을 알게 됐다. 물론 두상에 있는 경전의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경전을 가까이서 촬영한 이미지는 종교 및 역사 연구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어 의미가 매우 클 수 밖에 없다.
한편 2012년 말에 한국미술 수집에 관한 국제 심포지움을 열기도 했던 한 뮤지엄은 현재 자체 웹사이트(http://www.harn.ufl.edu/collections/asian)에 목제도금보살좌상을 360도로 볼 수 있는 비디오와 함께 다양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 고려시대 매병. ⓒ 최정희 |
▲ 전시실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 중 일부. 앞쪽 우측 원형 지붕타일과 뒷쪽 좌측 받침대는 삼국시대, 앞쪽 좌측 물병은 통일신라시대, 나머지는 고려시대 골동품. ⓒ 최정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