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문학회_할머니).jpg

 

콩 심은데 콩 나고 / 차수희

 

씨를 심었다. 냉동 칸에서 툭하고 떨어진 검정 봉지 속에는 기억에도 없는 씨앗들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동면중이었던 것일까? 혹시나 살아나길 바라며 땅 속으로 자리를 옮겨주면서 이왕이면 꽃이나 열매까지 맺어준다면 더 좋겠지 싶음에랴. 무슨 식물인지도 모른 채 물을 매일 매일 주던 나는, 미래가 어찌될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삼팔선을 넘어왔다던 그녀를 떠올린다.

 

만 이 년 만에 다시 찾았던 한국. 그 사이 구순의 고개를 넘어버린 친정 엄마는 노인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몸은 특별한 탈이 없다지만 반노환동(返老還童- 늙은이가 어린아이로 변했다는 뜻)이라 했던가? 태어나고 자랐던 평양에서의 시간들을 회상하며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하루를 채워간다. 소녀 시절의 추억이 그토록 노년의 삶을 미소 짓게 할 줄이야. 말똥만 굴러도 웃어대던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깔깔거림을 말할 때는 내 귀에도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의 입에서 계속 언급되는 ‘우리 엄마가, 우리 아버지가’라는 단어가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 엄마로만 살아왔던 그에게서 어린 아이의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그리운 당신의 어릴 적 부모님을 그 동안 어찌 참았을꼬. 대청마루에서 근엄하게 자리를 지켰다던 왕할머니는 집 안의 대소사에서 수습하는 말로 항상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이다’ 로 마무리 짓곤 했다고. 그 때는 어려 정확히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지만 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으니 그 진리는 대를 거듭하고 있다. 이 단순한 말이 삶의 흔들리지 않는 지지대가 되고 있음을 내가 환갑도 훨씬 넘게 살아내며 여전히 확인하고 있으니. 이팔청춘의 시간들을 풍요롭게 잘 보낸 고향을 떠나야 하는 역사적 사건이 그에게 생겼다. 해방 직후 소련이 점령하면서 무차별 약탈이 점점 심해지니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식구들이 이북 탈출만이 절실한 나머지 앞날은 그려지지가 않았다고 했다.

 

나 또한 삶의 터전을 옮기는 모험을 감행했던 순간이 있었다. 호주 개척 이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초 개방된 바이 센테니얼 파크. 이 공원을 처음 찾았을 때는 새로 심은 나무들이 너무 어려 그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47.4헥타르 면적의 쓰레기 매립장을 탈바꿈 시킨 직후이니 가냘프게 겨우 뿌리박고 흔들거리는 묘목들이 내 모습을 닮았었다. 미지의 세계에서 구체적인 계획도 세울 수 없어 그냥 하루하루 부지런히 일하며 세월을 만들 밖에. 콩을 심었다는 생각에 콩을 거두고 싶었고 그럴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으로 키워낸 자녀들은 이제 독립하여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요즘 그 공원으로 매일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에 운동 겸 산책을 한다. 초창기엔 민둥산 같았던 언덕마다 이제 아름드리나무들이 무성하다. 덕분에 다양한 새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지저귀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듣기 좋은 음악이 되어준다. 호수에서는 펠리컨도 만나고 가을엔 때 맞춰 갈색 낙엽도 흩뿌려준다. 겨울로 접어드니 나목을 보여주어 다행히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의 사계절까지 살짝 느껴볼 수 도 있다.

 

땅을 헤치고 드디어 푸른 잎이 여기저기 반갑게 돋아나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봉숭아가 맞지 싶다. 꽃까지 피어나면 손톱에 물들이며 나로 인해 시드니가 고향이 된 자녀들과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겠다. 요즘 직장생활에 열심인 두 자녀와 모처럼 카페에 마주 앉았다. 좋아하는 일과 높은 연봉, 무엇이 우선일까? 열띤 토론 중이다. 지켜보던 나의 입에서는 절로 콩 얘기가 새어나오고, 심은 것만 수확할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뵌 적도 없는 친정 엄마의 왕할머니가 불현듯 궁금해진다. 아마 이 대물림이 계속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나보다.

 

  • |
  1. 종합(문학회_할머니).jpg (File Size:69.5KB/Download:31)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2623 호주 시드니한국교육원 개원 30주년 기념 '한호 교육 교류의 밤' 성황 톱뉴스 19.10.01.
2622 호주 뉴욕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스콧 모리슨 총리 file 호주한국신문 19.09.26.
2621 호주 한호간 하키 교류 활발해진다... 한인 하키협회 출범 file 호주한국신문 19.09.26.
2620 호주 캔버라 한국 대사관, 국경일 리셉션 개최 file 호주한국신문 19.09.26.
2619 호주 시드니에서 익어가는 한국 문화... 올해로 13년째 file 호주한국신문 19.09.26.
2618 호주 바닥 드러내는 NSW 강… ‘용수대란’ 현실화될 듯 톱뉴스 19.09.24.
2617 호주 폴크스바겐, 호주서 '배출가스 조작' 배상 합의…10만 대, 1억 2700만 달러 톱뉴스 19.09.24.
2616 호주 호주 기준금리 추가인하설 ‘모락모락’ 톱뉴스 19.09.24.
2615 호주 NSW주, 비상차량 통과 시속 위반 차량 과태료 인상 톱뉴스 19.09.24.
2614 호주 상원법사위원회, 이민자 신원조회 강화법안 ‘심의 완료’ 톱뉴스 19.09.24.
2613 호주 호주정부, 시민권 수여식 1월 26 오스트레일리아 데이에 '쐐기' 톱뉴스 19.09.24.
2612 호주 트럼프-모리슨, 미·호 정상 13년만의 국빈만찬 톱뉴스 19.09.24.
2611 호주 “한국산 수입 조개젓 먹지 마세요”... 리콜(Recall) 조치 file 호주한국신문 19.09.19.
2610 호주 시니어 노인들에게도 디지털 세상의 문이 활짝 열렸다 file 호주한국신문 19.09.19.
2609 호주 "병원 가실 때 한국어로 도와드립니다." file 호주한국신문 19.09.19.
2608 호주 먹거리 볼거리 놀거리가 풍성한 한 주를 즐기시라! file 호주한국신문 19.09.19.
» 호주 호주문학협회 산문광장 정기 기고 file 호주한국신문 19.09.19.
2606 호주 시드니수도관리국, 절수 위한 웹사이트 개설 톱뉴스 19.09.17.
2605 호주 문재인 대통령 대국민 및 해외 동포 추석 메시지 file 호주한국신문 19.09.12.
2604 호주 What's on in Sydney this weekends? file 호주한국신문 19.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