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노래
우리 정말 이대로 헤어지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십 년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너무 독하게 달려드는 거 아냐? 아예 뿌리를 뽑을 기세군. 날 쳐다보는 눈동자 안에는 증오의 불길만 이글거리네. 그 전에 보았던 복잡한 애증 따윈 흔적도 없이 사라졌군. 중년이 되면 사춘기가 다시 온다더니 이게 웬 난리람.
널 처음 봤을 때가 기억이 나. 그땐 한참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더라. 어디였지? 그래 스트라스필드 옥류관이었지. 넌 갓 결혼한 신부랑 함께 와서 양념갈비를 엄청 먹어댔지. 난 첫눈에 네가 좋았어. 다른 여자와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걸 보며 질투와 갈망 사이를 방황했었지. 어떻게든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네 아내가 도무지 틈을 주지 않더군.
그러다 드디어 기회가 왔어. 너흰 갈비를 먹고 나면 꼭 물냉면을 먹더라. 두 손으로 그릇을 들고 육수를 들이켜 마시는 순간을 노렸어. 네 아내의 얼굴이 냉면 그릇 속으로 쑥 들어간다 싶을 때 난 네 안으로 쏙 들어가는데 성공했어. 풍성한 열매를 기약하며 겨자씨를 심은 거야.
비록 양념갈비와 냉면으로 시작했지만 정작 날 키운 건 팔할이 월남쌈이었어. 한국 드라마 비디오 하나 틀어 놓고 30개 정도를 싸먹는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아니? 다 먹고 나면 식도까지 꽉 차올라 한동안 일어서지도 못하더라. 맹꽁이 같은 널 보며 배꼽을 잡고 얼마나 웃었던지. 네가 공급한 월남쌈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두었어. 이곳 저곳 빈 곳마다 물샐 틈 없이 빡빡하게 밀어 넣었어. 몇 년간 은밀하고 위대하게 이루어진 역사였지.
음지에서 암약하던 나는 우연한 충동에 커밍아웃했어. 어느 더운 여름날 너는 반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가족들과 피크닉을 갔었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파란 하늘을 보다가 문득 온 세상을 향해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불쑥 솟아올랐어.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언제까지 어둠의 자식처럼 살 수는 없잖아. 결국 나는 백고래가 수면으로 머리를 들어올리듯 너의 하얀 셔츠 위로 휘둥그레한 몸을 일으키고야 말았어. 날 보더니 네 아내는 깜짝 놀라더라. 그러더니 대놓고 “임신 몇 개월이냐?”며 놀리더라. 그 말에 넌 얼마나 부끄러워하던지. 무슨 죄라도 졌니? 이제 배둘레가 원만한 중년 아저씨라고 왜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했니?
그 뒤로 너와 나 사이에 애증의 줄다리기가 시작됐어. 양복을 입으면 어찌나 허리끈을 꽉 조이는지 온종일 숨막혀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알지? 나 잘 안 죽는 거. 더구나 내 사전에 아사는 몰라도 질식사는 없어. 네가 회식이라도 하면 난 허리띠고 단추고 거침없이 뚫고 앞으로 전진하는 용자를 보여주었어. 다들 놀라더군. 내 성격이 꽤 부드러운 편이지만 누구든 내 앞을 막으면 다 튕겨낼 자신이 있다구.
허리 치수가 늘면서 나에 대한 너의 적대감도 커지더라. 아침에 샤워할 때면 샌드백이라도 되는 주먹으로 치고 손톱으로 할퀴고 난리법석이더라. 그런다고 내가 주눅이라도 들 줄 알았다면 완전 오산이야. 십 년을 고생해서 일군 풍요로운 식민지에서 쉽사리 철수할 순 없어. 우린 계속 같이 가는 거야.
너의 미움이 커질 수록 나는 점점 앞으로 자라났어. 남자가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어. 위로는 안 크니까 앞으로라도 커야지 안 그래?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넌 왜 그리 유별나니? 배에다 가죽자루 하나씩 달고 사는 게 50대의 여유야. 왜소한 가슴과 팔 아래 광대한 뱃살을 보면영락없이 귀여운 골룸이지.
복부 비만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비상시를 대비한 곡식창고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전쟁이나 재해가 발생하면 한동안 변변한 식량 없이 보내야 할 수도 있다구. 그런 유사시에 기름진 아랫배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유비무환이라구. 믿음직한 배가 받쳐 줘야 비로소 흥겨운 함포구복 태평성가를 부를 수 있다구.
요즘 들어 네가 하는 생각과 행동을 보면 무슨 빨간 물이 든 사람 같아. 아저씨가 뭔 몸매 관리를 한다고 날뛰는지 이해할 수 없어. 느닷없이 ‘적폐청산’이니 ‘뱃동산을 분화구로’ 같은 무식한 구호를 외치지 않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쌀밥을 식탁에서 몰아내더니 고구마, 호박, 아보카드, 귀리, 콩, 야채 같은 화전민 식단으로 바꾸더군. 날 아예 굶겨 죽일 속셈이지. 거기다 간헐적 단식과 아침 달리기까지 탄압의 수위를 점점 높이고 있어. 난 따로 갈 데도 없는 처지인데 갑자기 방을 빼라니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와.
그러는 사이 보름달 같던 몸매가 소담스러운 바가지 정도로 확 졸아들었어. 넌 당장이라도 ‘뱃동산’을 정복할 것처럼 의기양양이더라. 하지만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야. 외곽 지역은 원래 늘었다 줄었다 고무줄이거든. 중요한 건, 그 너머 이너서클이지. 아무리 졸아들어도 그 바가지 안에는 최정예 특수부대가 진치고 있어. 융단폭격을 퍼부어도 미동도 않고 자리를 지킬 거야. 강철 진지전을 펼칠 거라구. 너와도 절대 헤어지지 않고 느끼한 사랑의 뱃노래를 끝까지 부르고야 말 거야.
관계는 시간의 퇴적물이야. 20년을 쌓아 올린 뱃동산을 이제 와서 어찌하겠다는 건 무모한 시도야.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 작금의 적대를 과감히 청산하고 공존공영, 평화번영의 새 시대를 열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정동철 /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