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작아진 남자
아들 셋과 승강기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공간에 장성한 아들들과 함께 있으니 마치 큰 기둥들 사이에 낀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태어난 뒤 지금까지 쌓인 세월의 탑이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 최장신을 자랑하던 아버지가 어느새 최단신이 되고 만 것이다.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를 존중하면서도 만만해 했다.
한국과 호주에 있는 친인척을 통틀어 최초로 키 180cm를 돌파한 스물한 살 장남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부채 같이 큰 손바닥을 펴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이런 그에게 자주 ‘귀엽다’며 해주었던 친근한 표현이다. 이제는 완전히 역전이 된 터라 대견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압도적인 위용으로 ‘쓰담쓰담’ 하는 아들을 올려다보다 하마터면 ‘형’이라고 부를 뻔했다.
열일곱 살 둘째는 까칠한 식성 탓에 형제들에 비해 성장이 약간 더딘 편이다. 몇 년 전 급성 면역 질환으로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극적으로 완치된 적이 있어 아프다면 아픈 손가락이었다. 당연히 아내는 지극 정성을 다해 우선순위를 두고 챙겼고 어느 때부터인가 쑥쑥 크더니 이젠 녀석도 아버지를 내려다볼 만큼 자랐다. 그저 건강하기만 해도 고마워 자주 안아주었는데 점점 버거워졌다. 더는 아버지의 걱정이 스며들 틈이 보이지 않아 안심이 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열다섯 살 막내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다. 추상명사인 사랑이 물화(物化)가 되면 이런 자태일까? 눈짓, 손짓, 몸짓 하나하나 심지어 화를 내며 안달해도 괴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났다. 훌쩍 자라버린 첫째와 둘째에 비해 아이다움을 잃지 않아 애틋한 마음이 쏠렸다. 한데 큰형을 따라 키가 커야겠다며 한동안 운동과 섭생을 신경 쓰더니 효과가 있었다. 얼굴만 보면 여전히 아이지만 가까이 가면 녀석의 입 부위가 내 시야를 가릴 만큼 키가 컸다. 이제는 키 차이 때문에 안으려고 애쓰다 보면 결국 녀석의 품에 안기게 된다.
나이가 들면 성장이 멈추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키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간신히 170cm를 넘긴 크지 않는 키지만 한 번도 작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크면서 아버지의 키는 상대적으로 급속도로 작아졌다. 과거엔 높은 울타리였으나 세월의 풍화 속에 작고 왜소한 존재로 낡아지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단단한 병뚜껑을 여는 일이 있으면 아내와 딸은 더 이상 아버지를 찾지 않는다. 큰아들을 찾아 부탁하거나 아니면 둘째나 막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고 한다. 번거로운 일이 자동으로 면제되는 분위기라서 고맙지만 이 또한 아버지의 영역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는 증상 중 하나이다.
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에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아이 둘을 등에 업고도 거뜬했던 ‘천하장사’ 아버지는 오래된 사진 속에서나 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광음(光陰)은 분초도 쉬지 않고 흘러 사람을 키우기도 하고 작아지게도 하나 보다. 고향에 살고 있는 팔십 노인이 된 아버지도 장성한 나를 보고 이런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는 그도 내 눈에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거인처럼 다가왔던 존재였다.
철부지 삼형제는 당장은 키가 작아진 아버지를 보며 신기해하는 것 같다. 세월이 더 흘러 내가 지금의 아버지만큼 나이가 든다면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그들도 늙고 쇠잔한 아버지를 나처럼 먹먹한 가슴으로 그리워할까?
정동철 /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