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유명 역사가 찰스 빈(Charles Bean)은 ‘높아진 자립심’ ‘독창성’ ‘기회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동료에 대한 충실성’ 등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3년여 호주 국민의식을 대변하는 기념이었다고 묘사했다. 사진은 마차를 타고 하는 한 호주인 가정으로 1911년의 풍경.
1911년 호주 인구 445만5천 명, 중간 나이 24세
멜번, 파리 및 런던 못지않은 유행과 패션의 도시로 성장
전쟁이 시작된 지 100년,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는 여전히 유효하다.
영국의 요청에 따라 갈리폴리 전투를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호주는 이 전쟁을 통해 국가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영국을 모국으로 여겼던 호주는, 영국이 갈리폴리 작전을 무리하게 진행하다 호주 병사들을 무수히 희생시키자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아울러 전쟁에서 동료 병사들과의 진한 전우애를 통해 끈끈한 ‘동료의식’을 싹틔우게 된다.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호주인의 ‘동료의식’(mateship)은 죄수의 역사에서 시작되었지만 1차 대전 참전을 통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 발발 100년을 기해 세 가지 주제의 기획 시리즈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25가지, △호주의 1차 대전 참전 Timeline에 이어 △1차 대전 발발 당시의 호주사회의 모습을 각 분야별로 알아본다. <편집자 주>
‘높아진 자립심’ ‘독창성’ ‘기회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동료에 대한 충실성’... 호주의 유명 역사가 찰스 빈(Charles Bean)은 이런 개념들이야말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3년여 호주 국민의식을 대변하는 것들이었다고 묘사했다.
빈은 갈리폴리(Gallipoli)와 프랑스 서부전선(Western Front)의 호주 군인들 사이에서 탄생된 정신은 호주 전 국민들에게 깊이 배어들게 됐다고 진단했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호주 군인들이 보여준 투철한 군인정신과 진한 동료애(miteship), 호주 군인들의 희생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국가 개념(전쟁 전까지만 해도 영국을 종주국으로, 영국 여왕에 대한 높은 충성심이 있었다), 영국 의존도를 벗어남으로써 생겨난 독창성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1차 세계대전 이전, 호주인들이 좋아했던 것은 무엇이고, 당시 호주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각 부문별로 간단하게 알아보면...
■ 인구
-1911년 실시한 인구 센서스 결과 호주 인구는 445만5005명이었으며 중간 나이는 24세였다.
-‘노인층’으로 구분된 65세 이상의 연령은 전체 인구 중 4%가 조금 넘는 수치였다.
-15세에서 64세 사이의 연령층 가운데 남성이 거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당시 가장 큰 도시는 시드니(Sydney)였으며 가장 작은 도시는 호바트(Hobart)였다.
-호주 연방이 결성된 1901년 제정된 호주 이민법에 따라 호주 이민자는 유럽에서 온 백인들로 제한되었다.
■ 원주민 인구
-1914년 호주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Torres Strait Islander)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없었다.
-인구조사(Census)에서 원주민은 제외됐다. 또 호주 헌법상 이들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으며 선거권도 없었다.
-호주 방위법상 원주민의 군 복무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명 이상의 호주 원주민들이 전쟁터로 갔고 이들은 호주 군인들과 동일한 전쟁 수당을 받았다.
■ 교육
-당시 호주 국민은 매우 높은 교육수준을 보여 전체 인구 가운데 96%가 읽고 쓰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많은 아이들은 일을 해야 했기에 12세쯤이면 학교를 그만두었다.
-각 주(state)마다 다른 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NSW 주의 경우 6세에서 14세 사이의 아동은 연중 최소 140일은 학교 수업을 받아야 했다.
-1912년 퀸즐랜드(Queensland)는 일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 하이스쿨이 시작돼 일반과정 및 상업, 과학 과정이 제공됐다.
■ 경제
-1914년 농업과 제조업이 호주 경제를 이끌었다.
-목장 산업은 경제 활동의 중심이었으며, 당시 속도가 느린 범선이 석탄증기선으로 대체됨으로써 수출도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호주인 노동자의 임금은 하루 8실링이었다. 오늘날 달러화로 비교하면 대략 43달러였다.
-일부 도시의 경우 부엌이 딸린 3침실 주택의 주당 임대료는 12실링(현재의 65달러 수준)이었으며, 각 가구 소비에서 음식과 임대료를 제외한 지출은 주당 14실링(현재의 75달러 수준)이었다.
-NSW 주 산업법원에 따르면 4인 가족의 생활임금은 주당 48실링(현재의 232달러 수준)이었다.
■ 쇼핑
-1914년 멜번(Melbourne)은 연방 정부가 자리한 곳이었으며 쇼핑의 중심지였다. 역사학자 마이클 맥커넌(Michael McKernan)은 멜번에 대해 “유행이나 시설 면에서 파리(Paris)나 런던(London)과의 거리감이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호화로운 도시였다”고 묘사한 바 있다.
-하드웨어, 잡화, 문구, 부엌용품 등을 1실링 이하로 판매하는 콜스(Coles) 잡화점이 1914년 문을 열었다.
-마크 포이스(Mark Foy's)는 시드니의 최고 백화점이었다. 1914년 겨울 이 백화점의 카탈로그는 코르셋과 모자를 포함해 무려 108페이지에 달했다.
■ 스포츠
-호주인들의 스포츠에 대한 열정은 이미 대단했다. 스노위 베이커(Snowy Baker), 아네트 켈러먼(Annette Kellerman), 빅터 트럼퍼(Victor Trumper), 달리 메신저(Dally Messenger) 등은 수영, 복싱, 크리켓, 럭비 등에서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1914년 하와이의 서핑 전설인 듀크 카하나모쿠(Duke Kahanamoku)가 호주를 방문하면서 호주에도 서핑이 소개됐다. 이를 계기로 서핑 관련 장비 등의 전시가 열렸으며 시드니 프레시워터 비치(Freshwater Beach)에서 서핑 강습이 이뤄졌다.
-목에서 무릎까지 하나로 된 수영복, 원피스 형 테니스복, 울(wool) 반바지(breech. 무릎 바로 아래서 여미는 반바지)는 스포츠 스타들이 즐겨 입는 운동복이었다.
-호주 수영 스타인 패니 듀랙(Fanny Durack)과 미나 와일리(Mina Wylie)가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했다.
■ 엔터테인먼트
-파리(Paris)의 살롱에서 탱고(tango)가 호주로 건너와 탱고마니아 열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 춤을 즐긴 것은 아니어서 특히 멜번의 ‘팔레 드 당스’(Palais de Danse)라는 이름의 살롱은 이 부도덕한(?) 춤에 대해 항의하는 이들이 모이는 대표적 장소였다.
-호주 영화산업이 크게 번성했고 특히 호주 영화계는 오지로 도주한 범법자를 다룬 소재를 개발해 인기를 끌었다.
-음악 녹음의 질이 크게 향상됐고 많은 가정이 녹음된 콘서트 음악, 오페라를 들을 수 있는 축음기를 갖고 있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증가했고 보다 많은 호주인들이 개인 카메라를 구입했다.
■ 통신
-1912년, 시드니와 멜번을 연결하는 무선 전신국이 만들어져 전화가 가능해졌다. 당시 이 전화라인을 개설한 가구는 2,530가구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전화는 주로 사업자를 위한 것이었으며 호주인들은 여전히 활자를 통해 서로 접촉하거나 연락을 취했고 뉴스를 접했다. 역사학자 마이클 맥커넌은 “당시 신문은 정말로 크게 확장됐고 그 수도 엄청났다. 길거리에서 신문팔이 소년들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크게 외치면 이 소식이 빠르게 전파됐다”고 묘사했다.
-최초의 연방 우표는 1913년 발행됐다. 이 우표는 호주 지도 모양 위에 캥거루를 그린 것으로 1페니(penny)에 판매됐다.
-항공우편이 시작된 것은 1914년 7월로, 프랑스인 모리스 길로(Maurice Guillaux)가 멜번에서 시드니까지 9시간을 날아 우편물을 전달했다. 당시 그가 이용한 비행기는 목재와 직물로 제조된 블레리오 단발비행기(Bleriot monoplane)였으며 최초 우편 항공에는 1785개의 엽서가 실려 운송됐다.
■ 교통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호주의 도로 위에도 자동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멜번은 새로운 전동차(electric tram)가 들어섰지만 마차나 자전거 등은 여전히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호주의 각 주를 연결하기 위한 호주 대륙 기차 라인 공사가 1914년 8월 시작됐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