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의 친서를 전달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문재인 정부 외교력에 남북문제 달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전쟁 직전의 한반도가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북미 대화까지 실현될 것으로 기대하는 국면을 맞이했다. 북한 핵과 미사일이라는 두꺼운 얼음이 그대로인 겨울에서 대화라는 꽃이 활짝 핀 봄이 온 것이다. 얼음이 깨져 물속으로 빠질지, 천천히 녹아내릴지는 알 수 없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1월1일 신년사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히면서 남북관계 변화를 희망했다. 이를 계기로 남과 북은 1월초 장관급 회담을 열어,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와 함께 군사회담을 개최 등에 합의했다.
이후 남과 북은 실무회담과 전화통지문 접촉 등을 통해 북한 대표단, 응원단, 예술단, 태권도 시범단 파견 등을 일사천리로 합의했다. 북한 대표단 응원단 예술단 등은 경의선 육로, 동해안 해로(만경봉 92호), 서해 항공로(대표단) 등 다양한 경로로 내려왔다. 또 아시아나 항공도 남북 선수단을 태우고 양양~원산을 왕복 운항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특사’로 파견, 친서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3차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또 평양으로 돌아온 북한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올림픽을 계기로 화해와 대화의 좋은 분위기를 더욱 승화시켜 훌륭한 결과들을 계속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올림픽 이후에도 화해와 대화 분위기를 계속 진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북한의 변화, 예견된 수순?=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올해 들어 핵과 미사일이란 긴장 모드에서 화해와 대화 모드로 전환할 것이라는 예견들이 있어 왔다.
북한은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이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지난해를 ‘핵 무력의 완성의 해’로 설정했었다. 그리고 핵탄두 소형화와 함께 운반체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일단 유사시에 미국 본토를 핵 공격할 수 있음을 과시한 것이다.
이처럼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상, 미사일 시험발사는 무의미하며, 당연히 경제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다. 지난 2016년의 7차 당 대회에서 발표한 5개년 발전계획도 챙겨할 때가 됐다. 올해가 5년의 중간 지점이다. 2020년 8차 당 대회에서 확실한 성과를 내놓기 위해선 지금부터 경제에 ‘올인’해야 한다.
그런데 핵개발과 미사일 시험발사로 인한 유엔 안보리와, 미국 등 각국 제재는 5개년 발전계획 추진에 엄청난 장애물임에 틀림없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선 제재를 완화 또는 궁극적으로 해제하려면 남북이든 북미든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한이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와 미국 등의 제재를 일시적으로 풀어달라고 수차례 요청, 이를 성사시켰다. 아시아나항공의 원산 운항, 북한 만경봉-92호의 입항, 최휘 북한 국가올림픽위원장의 방문 등이 사실상 제재 대상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영공에 들어간 항공기의 경우 180일 간 미국 운항을 제한하고 있다. 만약 이 제재가 유효하다면 아시아나항공이 원산을 들어갈 경우, 반년 간 미국 노선은 올스톱해야 한다. 그러나 ‘평화 올림픽’이란 특수 상황을 고려해, 아시아나항공의 원산 취항을 허용한 것이다.
평창 올림픽 참가만으로도 제재 완화 효과를 본 셈이다. 이 때문에 북한이 강력한 제재 공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올림픽을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은 당장의 제재 완화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상회담 등을 통한 남북 화해 분위기를 기반으로 북미, 북일 대화를 이어가면서 제재를 풀려고 할 것이란 분석이다. 물론 미국과 일본 정부의 경우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 없이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나, 남북 관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그해 10월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조명록 차수가 각각 평양과 미국을 방문하는 등 북미 관계가 급물살을 탔었다. 또 일본도 고이즈미 당시 총리가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다만, 당시엔 핵과 미사일이 지금처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남북관계 일단 순항… 미국이 변수= 북한은 지난 1970년대 이래 남북관계를 대미 관계개선의 발판으로 활용하려 했다. 또 국내외적 환경이 불리하다 싶으면 언제든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현실이 남북관계 개선 없이는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 체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의 수교 직후 인 1972년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친동생인 김영주를 내세워,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김일성은 불과 4년 전에 있었던 1.21 무장공비 남파에 대해서도 “좌익맹동분자의 소행”이라면서 간접 사과까지 했다. 전통적 우방인 중국이 미국과 수교한 이상 진영 외교가 쉽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1990년 초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채택 역시 1980년 말 소련의 해체와 동구 공산체제 와해 등으로 인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으나, 미국은 남북관계 개선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궁극적 목표가 북미 대화라면, 지금처럼 강경한 미국 정부와 마주 앉기 위해선 한국 정부를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3차 정상회담 등을 통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꾸면, 미국 역시 대북 강경책만 고집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남북대화와 북미대화를 함께 끌고 나가면서 남북간 화해 협력과 북핵 미사일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입장이라, 3차 남북 정상회담은 시간문제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남과 북이 모두 관계개선 의지가 있고, 과거 경험도 있어 다양한 교류, 협력들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지난 1차와 2차 남북 정상회담 직후의 남북관계처럼 속도를 내기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만만치 않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북핵과 미사일 문제로 인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보다 미국 정부의 눈치를 더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당장 평창 올림픽을 이유로 연기한 한미 군사훈련을 어떻게 할지 관건이다. 남북 화해 분위기를 감안해 미국 측이 올 한 해는 아예 훈련을 하지 않는다거나, 최소 규모로 축소해 진행할 경우 대화 모멘텀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내 군부 등 대북 강경파들의 입김에 의해 예정대로 군사훈련을 진행할 경우, 북미대화는커녕 남북관계 마저 흔들릴 수 있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은 물론, 오는 9월 정권수립 70돌(9.9절)을 성대하게 기념하겠다고 한 점에서 미사일 시험발사 등 당장 군사적 도발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한미 군사훈련의 1년 연기나 규모 축소 카드를 꺼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능력에 달려 있다.
결국 평창 올림픽 계기로 마련된 남북 화해 분위기는 문재인 정부가 어떤 대책이나 전략으로 트럼프 미 행정부를 설득해 북미 대화를 성사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김대중 정부가 사실상 만들어 클린턴 행정부가 발표토록 한 ‘페리 프로세스’와 같은 종합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런 저런 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는 올림픽이 끝나면 당장 3차 남북 정상회담이란 과실을 어떻게 얻어낼 것인지 외교적 숙제를 안게 됐다. 더욱이 취임 초부터 외교라인에 대해선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부담이다. 그러나 대미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 정상회담을 오는 6월 지자체 선거 전에 성사시킨다면, 선거 압승까지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올인’ 해 볼만 하다.
김인구 / 본지 편집인, 전 조선일보 북한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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