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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계 백인 정착 초기, 호주의 일부 지배 계층에서는 노예를 소유했거나 대서양 노예무역 가문 출신들이 노예를 통해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식민지 형성에 관여한 사실이 있다. NSW 식민지 제5대 총독으로 부임한 라클란 매콰리(Lachlan Macquarie)는 자신의 일기에 두 명의 소년 노예를 구입했음을 기록했다. 사진은 시드니 Hyde Park에 있는 매콰리 총독의 동상. 사진 : Wikimedia Commons

 

호주 식민지 초기 '노예제도'와 관련된 일부 지배층 인물들의 역사적 진실 드러나

‘father of Australia’로 불리는 매콰리 총독, 일기장에 '흑인 소년 노예 구입' 기록

 

많은 호주인들은 240여 년의 길지 않은 호주 역사 기록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1950년대의 호주 역사서를 오늘날과 비교하면 이 부분(논쟁이 되어 왔던 부분)이 얼마나 많이 수정됐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역사서들은 호주의 원주민들(Australia's First Nations)에 비해 영국 왕실에 대해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그 반대이다. 지난해 9월, 연방 교육부 알란 텃지(Alan Tudge) 장관은 국가 커리큘럼 변경안에 대해 “현대 호주를 경시하고, 서구 문명을 경시하며 우리의 자유 민주주의를 경시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호주에 대한 지나치게 부정적 견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결국 호주의 국가적 이야기는 일부 사람들의 부와 기회가 다른 이들의 그것을 빼앗아간 동일한 인정 범주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계속 발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서구 문명을 부당하게 축소하거나 호주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반영하는 것일까. 오늘날의 호주 국가 형성에 관여한 이들 가운데 일부가 다른 이들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그 사실만으로 그들(국가 형성에 관여한 이들)과 이 나라의 토대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바뀔 수 있을까?

 

점차 드러나는 많은 사실들

 

노예제도는 15세기 중반 이전, 여러 유럽 및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으로 알려진 이후 시기에 시작된 사람들의 새로운 무역에 의해 야기된 사회적 혼란의 규모나 강도, 그 수준은 이를 독특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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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경 호주로 건너온 이들 중 약 200명의 영국인 정착자들은 당시 영국 노예제도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진은 영국계 백인들의 시드니 코브 입항을 묘사한 그림. 사진 : Wikimedia Commons /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400년이 넘는 기간, 약 1,25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미 대륙으로 이송되었다. 이는 세계 역사에서 당시까지 보여준 세계 최대의 대양횡단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의 강제 이주와 분산은 아프리카 지역의 폭력과 사회 붕괴를 초래했으며, 서구인들의 인종 계급에 대한 새로운 생각은 유럽 지역에서 노예무역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영국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에 비해 뒤늦게 노예무역에 뛰어들었지만 1700년에서 1808년 사이, 약 6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거래하면서 무역 부문에서 강한 성장을 구가했다. 그리고 1833년, 영국이 노예제도를 폐지했을 때 노예소유주, 노예무역상들은 대서양을 떠났다.

멜번대학교 및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대학교 연구원들은 호주 백인 정착 초기, 호주로 건너온 이들 중 약 200명이 유럽 국가의 노예제와 관련된 인물들이며, 이런 이들이 더 많을 수도 있음을 확인하는 중이다.

노예소유와 관련된 이들에게 있어 호주라는 식민지는 대영제국의 미래를 상징했다. 노예를 호주로 수입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첫 영국 죄수선을 이끌고 호주에 도착한 아서 필립(Captain Arthur Phillip)은 “자유로운 땅에는 노예가 있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누구도 노예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이들은 기독교인이나 백인이 아닌 이들의 토지와 노동력을 정당하게 사유화할 수 있다는 영국 노예제의 근본적 자만심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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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노예무역은 당시 일부 계층에 막대한 부를 안겨 주었다. 그림은 1800년대 초,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서인도 제도 동부의 안티과(Antigua) 섬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 사진 : British Library Creative Commons

 

예를 들어 대서양 노예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문의 자손으로, 서부호주(Western Australia) 초대 총독이었던 제임스 스털링(James Stirling)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침략군’(invaders. 노예상태와 같은 호주 원주민)을 이끌고 호주 서쪽(지금의 서부호주 주)의 3분의 1 지역 지역을 세 번째 식민지로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그가 묘사한 ‘invaded’는 서서히 문명화되어 가던 ‘야만인들’(savages. 호주 원주민)이었다.

실제로 당시 서부호주에서는 수많은 원주민들이 목축, 진주 산업에서 무임금으로 노역하도록 닙치되거나 갇혀 지냈다. 또 퀸즐랜드 주의 분다버그(Bundaberg, Queensland) 시장이 최근 원주민에 대한 사과 발언에서 인정한 바와 같이 남양제도(South Sea Islanders)에 살던 6만2천 명의 주민들이 퀸즐랜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도록 강제로 인신매매됐다.

최근 멜번대학교 역사철학부 연구원 조지아나 아노트(Georgina Arnott) 박사는 ABC 방송을 통해 “영국 및 호주의 노예 관련 역사에 대한 이 같은 이야기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지만 이제는 그 사실을 드러내야 할 때”라며 노예를 소유했거나 관련된 일부 사실들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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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클란 매콰리(Lachlan Macquarie) 총독의 초상화. 그의 일기에는 두 명의 인도 소년을 170루피에 샀다고 쓰여 있다. 사진 : Wikimedia Commons /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 식민지 총독

1809년 NSW 주 식민지 5대 총독으로 라클란 매콰리(Lachlan Macquarie)가 시드니 코브(Sydney Cove)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조지 자비스(George Jarvis)라는 인도 남자와 함께 였다. ‘father of Australia’로 불리는 매콰리 총독은 자바스가 6살이었을 때 노예로 구입했으며 자비스의 형인 다른 노예는 7살 때 산 것이었다.

당시 영국군 대위였던 매콰리는 자신의 노예들에 대해 “매우 훌륭하고 잘 생긴 흑인 소년들”이라며 170루피를 지불했다고 묘사했다. 자비스의 형은 도망을 쳤지만 어린 나이였던 조지 자비스는 평생 매콰리를 섬기며 살았다.

매콰리의 일기에 기록된 이런 사실은 그에 대한 수많은 긍정적 이야기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매콰리 총독은 또한 영국-카리브 해 노예제도에 의해 창출된 막대한 부의 수혜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제인 자비스(Jane Jarvis)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안티가(Antigua. 카리브 해 동부에 있는 작은 나라) 대법원장인 토마스 자비스(Thomas Jarvis)의 딸이었다. 매콰리 대위가 조지 자비스라는 노예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돈이 그녀의 가족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조지는 매콰리의 부인 제인의 성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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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콰리 총독의 첫 번째 부인인 제인 자비스(Jane Jarvis). 노예 소유주 토마스 자비스(Thomas Jarvis)의 딸로, 24살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남편인 매콰리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사진 : State Library NSW

 

제인 자비스가 24세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녀는 남편인 매콰리에게 6천 파운드, 오늘날 영국 화폐로 약 46만 파운드에 달하는 자금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 자금으로 매콰리는 인도에서 영국군 고위 직위를 살 수 있었다. 이런 승진은 그가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 및 반 디멘스 랜드(Van Diemen's Land. 지금의 Tasmania 주) 총독으로 임명되는 데 도움이 됐다.

 

▲ 새로운 지역 설립자

지금의 서부호주(Western Australian)를 만들어낸 제임스 스털링(James Stirling)은 영국 노예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가문(Glaswegian family) 사람이다.

그가 영국 식민지 자메이카(Jamaica)에서 영국 왕립해군 대위로 부상한 것은 가문의 막대한 부와 지위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해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호주 서쪽의 3분의 1 지역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영국 식민지관리청(Colonial Office)에 청원했다.

스털링이 청원한 호주 서부 지역 식민지화 시도는 1820년대까지 영국에서 NSW 주로 죄수들을 수송하던 부유한 대서양 노예상인 출신인 그의 장인 제임스 맹글스(James Mangles)가 주도했다.

맹글스는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의 많은 투자자들과 마찬가지로 호주 대륙의 서부 해안에 있는 영국 정착지에서 상당한 상업적 이득을 얻었다.

스털링의 두 할아버지와 그 위의 4대에 걸친 조부는 모두 노예들이 생산한 상품을 거래하여 큰돈을 벌었고, 이중 일부는 노예무역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또 그의 부친은 자메이카에 있는 노예 소유주와 직물을 거래했다. 스털링 가문의 부를 짐작하는 것 중 하나로, 스털링의 부친이 직물거래로 1년에 700만 파운드의 손해를 보았지만 거래는 계속됐다. 이 같은 엄청난 손실액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 타격을 받지 않을 만큼 그의 가문이 가진 자산은 엄청났다.

서부호주 정착을 위한 제안서에서 스털링은 노예제 옹호자인 토마스 무디(Thomas Moody)와 협력하여 백인의 사적 자금 지원을 받는 정착민, 아일랜드 출신 빈민 및 인도와 중국 정착민 등 3개 계층의 인종적 분리 방안을 식민지관리청에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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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서부 지역, 지금의 서부호주(Western Australia) 식민지를 만들고 초대 총독을 지난 제임스 스털링(James Stirling)은 노예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가문 출신이다. 사진 : Mitchell Library,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이 가운데 가장 아래 계층(인도 및 중국 노동자들)은 서부호주 지역의 극히 무더운 기후 조건에 있는 면화 농장에서 장기 노동계약과 매우 낮은 임금에 의해 지배되는(거의 노예와 같은) 또 다른 형태의 ‘노예’ 인력들이었다.

스털링이 제안한 이 같은 식민지 건설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수백 명의 계약직 노동자가 농업, 목축 및 진주 산업에서 최저임금으로 일하고자 지금의 서부호주로 왔다. 그리고 이들은 백인 노동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상황을 견뎌야 했다.

 

▲ 판사

호주 ‘National Trust’가 소유, 관리하는 멋진 빅토리아 시대 풍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빅토리아 주 스토닝턴(Stonnington, Victoria) 소재 ‘코모 하우스’(Como House)는 노예 소유주이자 영국 식민지 트리니다드(Trinidad. 서인도 제도 최남단의 섬. 지금은 독립국가)를 지배했던 버튼 윌리엄스(Burton Williams)의 아들 에드워드 에어 윌리엄스(Edward Eyre Williams)가 지은 것이다. 1842년, 지금의 멜번(Melbourne) 남부, 포트 필립(Port Phillip)에 도착한 그는 10년 후엔 1852년 대법원 판사가 되었지만, 이 직업이 당시 상당한 비용이 드는 코모 하우스를 건축할 만큼 부를 축적한 방법은 아니었다.

형제들과 함께 에드워드 윌리엄스는 트리니다드에서 64명의 노예를 소유했다. 노예제가 폐지되기까지 10년 동안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바하마에서 최소 450명의 노예를 갖고 있었다. 노예지 폐지와 함께 그와 형제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대략 21만 파운드 상당의 ‘인적 자산(노예) 손실 보상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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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주 스토닝턴(Stonnington, Victoria) 소재 ‘Como House’. 트리니다드(Trinidad)에서 상당수의 노예를 소유했던 농장주의 아들이자 1842년 호주에 정착해 대법원 판사를 지냈던 에드워드 에어 윌리엄스(Edward Eyre Williams)가 지은 것이다. 사진 : National Trust

 

영국은 지난 2015년이 되어서야 이 같은 보상금 지급을 위해 정부가 빌린 대출금을 다 상환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영국 납세자들의 세금 중 일부는 이 대출금 상환에 할당된 것이다.

윌리엄스가 트리니다드에서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만들었던 인종적 사례가 호주 백인정착 초기, 원주민들 대상으로도 행해졌는지는 현재 연구원들이 조사하는 사안 중 하나이다.

 

▲ 목사

1840년에서 1884년 사이, 로버트 올우드 목사(Reverend Robert Allwood)는 시드니 세인트 제임스교회(St James Church)의 교구장이었으며 1869년에서 1883년 사이에는 시드니대학교(University of Sydney) 부총장을 겸했다.

자메이카에서 출생한 그는 시드니로 오기 전, 노예를 소유한 아버지로부터 13만5천 파운드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또한 영국령 기아나(Guiana)에 있는 202명의 노예에 대한 보상을 영국 정부에 요구했지만 받지는 못했다.

올우드는 노예소유주였던 조셉 부시(Joseph Bush)의 딸인 아내 앤 레베카 부시(Anna Rebecca Bush)와 함께 호주로 왔다. 이는 그의 여동생 앤(Anne)에게 지금의 타스마니아로 이주하도록 하는 영감을 주었다. 올우드 목사의 여동생 또한 13만5천 파운드의 노예유산을 받았다. 이 덕분에 존 프랭클린 경(Sir John Franklin)의 개인비서이자 식민지 의회의 첫 서기였던 앤의 남편 프란시스 헨슬로(Francis Henslowe)는 타스마니아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올우드 목사 집안의 부는 그의 아버지가 소유한 노예 규모에서 짐작할 수 있다. 노예제 폐지 시점에 올우드 목사의 부친인 올우드 시니어는 자메이카에 있는 3개의 개별 농장에서 309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다른 농장에서 227명의 노예를 공동 소유했고 또 다른 농장에 있는 73명 노예에 대해서는 일정 지분을 갖고 있었다.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올우드 시니어는 현재 금액으로 약 50만 파운드에 달하는 보상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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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에서 1884년까지 시드니 세인트 제임스교회(St James Church)의 교구장이었으며 1869년에서 1883년 사이에는 시드니대학교(University of Sydney) 부총장을 겸하는 등 식민지 당시 종교 및 교육에 이바지한 인물로 묘사되는 로버트 올우드 목사(Reverend Robert Allwood. 사진). 그는 노예 소유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친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고, 그의 부인 또한 노예소유주의 딸이었다. 사진 : Wikimedia Commons: St James' Church, Sydney, NSW

 

올우드 목사는 현재 시드니의 종교 및 교육을 주도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노예를 소유했던 그의 인종적 견해가 시드니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괴로운 역사를 마주하다

 

아노트 박사는 “식민지 역사에서의 노예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질문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 노예소유 가문과 그 자녀들은 특히 인종과 노동 문제에서 어떻게 급성장하는 호주 식민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식민지 개척자들과 호주 원주민 사이의 관계는 일부 식민지 개척자들이 오랜 기간 지속하면서 혜택을 받았던 아프리카 대규모 노예화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을까’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아노트 박사는 “이제 이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 즉 대서양 노예무역 제도와 호주와의 연결고리가 이제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게 아니라 어두운 역사와 마주하는 데 겁을 먹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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