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중반 호주로 들어온 낙타는 당시 양모산업, 광업, 물 운송, 전신주 건설 등에 크게 활용됐다. 호주 국가건설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던 낙타와 이를 운용하던 낙타몰이꾼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호주 역사에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사진은 서부호주 브룸(Broome, Western Australia)의 케이블 비치(Cable Beach)에서 석양을 보며 낙타 투어를 하는 여행자들. 사진 : Red Sun Camels
최초의 낙타, 1840년 스페인에서 애들레이드로... 사막 탐험-양모운반 등 유용성 인정
“각 산업 부문에서 공헌한 낙타몰이꾼들의 이야기, 과거사의 한 부문으로 부각돼야”
호주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하나와 논쟁을 하는 것은 대담한 일이다. 하지만 작가이며 편집자인 라이언 부타(Ryan Butta)는 이를 꺼려하지 않는다.
그는 호주 최고의 시인이자 작가 중 하나이며 언론인이었던 헨리 로손(Henry Lawson)과 관련해 “그의 글은 백인 호주인들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에 여전히 스며있는 국가 정체성의 느낌을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글에는 눈에 띄게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1892년, 로손이 NSW 주 북서부 버크(Bourke)에서 보낸 시간(당시 버크는 극심한 홍수를 겪은 상태였음)에 대해 쓴 글에서 부타씨는 “그는(로손은) 원주민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인(당시 낙타몰이꾼)들도 무시했다”고 말한다.
부타씨는 저서 ‘The Ballad of Abdul Wade’를 쓰기 위해 낙타와 낙타놀이꾼(대부분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몇 년을 보낸 사람이다. ‘The Incredible True Story of Australia's unsung Pioneering Heroes’라는 소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책은 호주에 낙타를 들여온 압둘 웨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1901년경의 아프간 낙타몰이꾼 압둘 웨이드(Abdul Wade. 오른쪽)씨. 호주 내륙의 아웃백(outback) 지역에 물류를 위한 낙타 행렬을 사업화 한 아프간 출신 젊은 기업가였던 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시각은 ‘덕망 있는 사업가’와 ‘호주에 대한 위협’으로 나뉘었다. 사진 : State Library of Queensland
웨이드는 1890년대, 호주 내륙의 아웃백(outback) 지역에 물류를 위한 낙타 행렬을 사업화 한 아프간 출신의 젊은 기업가였다. NSW 버크를 기반으로 사업을 벌인 그는 낙타 운송의 가치와 함께 관대한 성품으로 버크 지역 주변에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특히 웨이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 전쟁을 위한 호주 측의 노력에 부응해 수백 마리의 낙타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 웨이드는 ‘그의 사업적 이익을 시기하고 또한 그의 기업이 커짐에 따라 백인계 호주인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지역사회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물론 웨이드에 대해서만은 아니었다. 당시 신문들은 아프간 출신 낙타몰이꾼(cameleer)들에 대한 커뮤니티의 정서가 상충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890년 대홍수 이후 ‘Cunnamulla Argus’ 신문은 기사에서 “(외부와의 고립으로) 식량이 거의 바닥났고 가장 가벼운 차량조차 우리에게 향하는 하이웨이로 들어올 수 없었을 때, 경멸당하던 아프간인들(낙타몰이꾼들)은 낙타와 함께 범람한 길을 뚫고 와 우리를 반 기아 상태에서 구해주었다”고 썼다.
1896년, 지금의 서부호주 물레와(Mullewa, Western Australia) 지역 탐험에 동행한 낙타몰이꾼 벤자 데르비시(Bejah Dervish). 낙타는 물이 귀한 내륙 사막지대에서 무거운 짐을 싣고 이동하는 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사진 : State Library of South Australia
1892년 ‘Bulletin’ 잡지의 사설은 “수입된 아시아인들은 이미 너무 많은 저주를 받고 있는 이 땅의 또 다른 값싼 노동자들의 저주”라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부타씨는 당시의 사회, 정치, 비즈니스 측면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존재성’(ubiquity)을 놓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부타씨는 “로손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1902년, 로손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버크를 이해하면 호주를 이해하게 된다”고 썼다. 하지만 그의 언급은 호주의 어떤 버전을 말하는 것일까.
낙타는 어떻게 하여 호주로 들어왔나...
낙타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처음 호주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는 얘기다.
많이 알려진 것은, ‘해리’(Harry)라는 이름을 가진 낙타가 1840년 포트 애들레이드(Port Adelaide)에 도착한 호주 최초의 낙타라는 이야기이다. 이 낙타는 필립스 형제(Henry Weston Phillips와 George Phillips)가 스페인령의 외딴 섬 테네리페(Tenerife)에서 운송한 것이었다.
1900년에 제작된 헨리 로손(Henry Lawson)의 초상화(사진).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그는 1911년, 'The Bulletin' 소속 기자로 낙타몰이꾼들의 활동이 많았던 NSW 북서부 내륙, 버크(Bourke)에 파견되어 약 9개월을 보냈다. 하지만 버크에서 보낸 기간, 그는 낙타몰이꾼들의 이야기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았던 듯하다. 사진 : State Library Victoria
애초 어떤 목적이었든, 호주로 들여온 낙타는 이후 내륙 사막 지역을 탐험하고 양모를 운반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동물로 간주되어 있으며 이후 몇 달 사이에 걸쳐 또 다른 낙타가 타스마니아(Tasmania)와 시드니에 들어왔다.
부타씨는 “낙타는 말에 비해 유지관리 비용이 더 저렴하고 물도 많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가뭄과 홍수 상황에서도 말에 비해 더 높은 이동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제임스쿡대학교(James Cook University) 역사학자 데이브 피닉스(Dave Phoenix) 박사에 따르면 1860년, 조지 랜델스(George Landells)라는 사람이 인도에서 수입한 25마리의 낙타가 멜번(Melbourne)에 도착했다.
당시 ‘Argus’ 신문은 이 낙타들이 ‘2명의 아랍인 보살핌 하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필립스 박사는 바로 이 두 명의 아랍인이 호주의 첫 낙타 조련사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이후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6년, 낙타 사업가 압둘 웨이드(Abdul Wade)는 호주 정부에 수백 마리의 낙타를 기증하기도 했다. 사진은 1918년 지금의 팔레스타인, 러드(Ludd, Palestine. 이스라엘 국경 인근 도시)에 주둔 중인 ‘제국 낙타군단’의 ANZAC 병사들. 사진 : Imperial War Museums
1860년, 탐험가인 버크(Robert O'Hara Burke)와 윌스(William John Wills)가 호주 전역을 탐험할 때, 이들은 낙타를 이용해 물을 운반했다.
그 이전에는 낙타가 호주로 수입(1840년 첫 낙타가 호주에 들어왔다고는 하지만)되거나 활용된 적이 없었기에 이들의 탐험에 시용된 낙타는 실험적이고 독특했으며, 실제로 호주 내륙의 극히 건조한 조건에서 그 가치를 입증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호주에서 낙타가 사육되기 시작했으며, 전역에서 상품 운반에 크게 활용됐다.
낙타몰이꾼들, 다양한
산업 부문에서 중요한 역할 수행
부타씨는 1800년대 중후반과 1900년대 초반, 낙타와 낙타몰이꾼은 양모산업, 광업, 물 운송, 전신주 건설(Overland Telegraph), 토끼방지 울타리(rabbit-proof fence) 조성 등 다양한 부문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저서에서 “호주 역사에서 여러 상징적인 일, 또는 사건에서 낙타가 그 시대에 크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고 썼다. 그러면서 부타씨는 “그것이 항상 인정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Overland Telegraph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런던과의 전화통화를 가능하게 해 준 배경에 낙타의 중요한 역할이 있었음을 들은 적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신원을 알 수 없는 1900년대 초반의 사진. 이 이미지는 당시 낙타의 효용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해 준다. 사진 :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이와 함께 부타씨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다. “우리가 낙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실제로 낙타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책임이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아프가니스탄 호주인 영화제작자인 파힘 하시미(Fahim Hashimy)씨는 호주의 아프간 낙타몰이꾼 이야기를 다룬 2020년 제작 다큐멘터리에서 이들(아프간 낙타몰이꾼)이 1888년 남부호주 마리(Marree, South Australia)에 호주 최초의 모스크를 건축한 것 등 초기 호주에 기여한 부분을 강조한다.
하시미씨는 또한 “낙타몰이꾼들은 호주의 전쟁 노력에도 힘을 보탰다”고 말했다. “그들은 군인으로 입대할 수 없었지만 호주에 대한 애정 때문에 호주사회에 기여하고자 그들의 낙타를 호주 군대에 바쳤다”는 설명이다.
과거의 시간을 조금만 훑어보면, 아프간 낙타몰이꾼들의 이야기는 거의 모든 부문에 담겨 있다. 그는 “이들의 흔적은 아웃백 운송로 상에 있는 모든 바위, 덤불, 언덕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정말 모르고 있다”
하시미씨는 호주 내 아프간 이민자들조차 당시 아프간에서 온 이들이 호주사회에 끼친 영향을 모르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또한 현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당시 낙타몰이꾼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라며 “안타깝게도, 호주에서 자란 이들도 이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하시미씨는 “호주인들이 가장 의미 있게 여기는 ‘안작데이’(ANZAC Day) 기념행사에서도 전쟁에 수많은 낙타를 제공한 낙타몰이꾼의 기여는 논의에 없다”고 지적했다. 부타씨 또한 “호주 역사에서 이런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수치”라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호주로 온 낙타몰이꾼들은 1888년, 남부호주 마리(Marree, South Australia)에 호주 최초의 모스크를 건축하기도 했다. 사진은 모스크 건축 현장의 아프간 낙타몰이꾼들. 사진 : State Library of South Australia
하시미씨는 1800년대 중후반, 아프간 낙타몰이꾼에 대한 이야기는 수천 건이 있다고 믿는다. 이중 다수는 긍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낙타몰이꾼)이 부시(bush) 지역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가령 호주 내륙의 사막 지대에서 어떻게 물을 찾아냈는지 등을 보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라는 그는 “당시 사람들은 이런 점을 놀라워했고, 그렇기에 우리는 낙타몰이꾼에 대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게 하시미씨의 말이다.
이어 그는 “그들의 많은 공헌과 이야기가 시간 속에 그대로 묻혀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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