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이자 역사연구가이기도 한 마가렛 캐머론-애쉬(Margaret Cameron-Ash) 연구원이 저술한 호주 초기 역사서 ‘Beating France to Botany Bay: The Race to Found Australia’(사진). 그녀는 영국의 호주 식민지화 이면에 죄수 유배지보다 더 중요한 당시의 국제간 경쟁이 담겨 있었다고 보고 있다. 사진 : Twitter / Margaret Cameron-Ash
한 연구원의 시각... “영국의 호주 식민지화 결정, 죄수 이송 이상의 배경 있었다”
1788년 영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700여 명의 영국 죄수를 비롯해 군인, 관리자 등 1,400명이 승선한 영국 제1함대(First Fleet)의 죄수 호송선이 지금의 보타니베이(Boany Bay)를 거쳐 시드니 코브(Sydney Cove)에 상륙하고 호주를 영국 신민지로 선포하기 이전, 유럽 각국의 탐험선이 호주 동부 해안 일대를 다녀간 바 있다.
1770년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보타니베이에 도착하고 주변 지역을 조사한 뒤 자신의 고향인 사우스 웨일즈(South Wales)와 닮았다 하여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라 명명하고 돌아간 이후, 영국에서는 이 새로운 대륙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1786년 여름, 런던에서 ‘호주’의 역사를 영원히 바꿀 결정이 내려졌다. 당시 영국 정부는 11척의 함대를 ‘뉴사우스웨일즈’라 명명된 지금의 보타니베이에 보내 남쪽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몇 세기가 지난 후 이 결정은 축하(호주 국가 입장에서)와 슬픔(기존에 거주하던 호주 원주민 입장에서)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 결정을 영국 침략의 시작이자 원주민 토지의 광범위한 박탈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상당히 덜 알려져 있다.
시드니와 런던에서 변호사로 일했으며, NSW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법률 및 초기 호주 역사를 연구해 온 마가렛 캐머론-애쉬(Margaret Cameron-Ash) 연구원은 지난 2021년 출간한 역사서 ‘Beating France to Botany Bay: The Race to Found Australia’에서, 오늘날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미국의 독립으로 새로운 죄수 유배지를 찾고 있던 영국이 호주를 그 대안으로 결정했다는)과 달리 영국이 단순히 죄수 유배지로 호주를 찾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캐머론-애쉬 연구원은 당시 영국의 호주 식민지화를 그 시대의 치열한 국제간 경쟁 문제 이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결과가 매우 다를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호주 식민지화를 위한
높은 비용과 복잡성
1768년에서 1779년까지의 항해에서 영국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 지도제작자였던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은 수만 년에 걸친 원주민의 존재와 그들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호주를 영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쿡 선장의 항해 이후 1779년과 1785년 두 차례에 걸친 영국 의회 조사에서 호주 식민지화가 권고됐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국 제1함대(First Fleet)의 보나티베이(Botany Bay) 입항을 묘사한 그림. 필립 선장은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명을 받은 프랑스 탐험가 장프랑수아 드 갈롭(Jean-François de Galaup. La Pérouse 백작)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했다. Source : Wikipedia
이에 대해 케머론-애쉬 연구원은 “두 가지 풀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식민지화에 소요되는 비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의 거부권이었다. 그녀는 “이들(동인도 회사)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한 무역 독점권을 가졌고 호주는 그 한 가운데에 있었다”며 “이들은 그 어떤 것도 원치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녀에 따르면 1780년대 중반까지 호주를 식민지화 한다는 생각은 영국 입장에서 너무 많은 비용이 들고 또한 너무 복잡한 문제로 인해 애시당초 가능성이 없는 사안(non-starter)이었다.
그러던 것이 1786년 여름, 한꺼번에 바뀌었다. 이는 편지 형식으로 된, ‘폭탄선언’과도 같은 내용 때문이었다.
영국에 전달된 미국의 정보
그 즈음 프랑스는 영국과의 오랜 전쟁에서 패배, 많은 식민지를 잃었다. 캐머론-애쉬 연구원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는 남반구에서 새로운 프랑스 제국을 시작함으로써 이전의 명성을 되찾을 계획이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 독립을 쟁취하고 새로이 국가를 형성한 미국은 태평양 지역 주변에서 프랑스의 새로운 식민지 야심을 경계했다. 그러던 중 호주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그들의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는 프랑스 탐험가 장프랑수아 드 갈롭(Jean-François de Galaup. La Pérouse 백작)이 지휘하는 프랑스 호위함 2척이 태평양으로의 항해를 시작했으며, 이 배에는 뉴사우스웨일즈와 같은 기후 지역에서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본 필수품 및 농업용품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 미국인이 영국인에게 보낸 편지로, 미국 정보부가 입수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캐머론-애쉬 연구원은 “이 같은 내용의 정보는 (호주 식민지화에 대한) 높은 비용 및 동인도 회사에 대한 영국 당국의 우려를 압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입장에서 프랑스가 (호주와 같은) ‘전략적 장소’를 식민지화 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탐험가 장프랑수아 드 갈롭(Jean-François de Galaup. La Pérouse 백작. 그림). 아서 필립 선장의 첫 죄수호송선인 제1함대가 영국 포츠머스 해군기지를 출발하기 전, 그는 이미 프랑스 왕의 명령으로 태평양 지역 섬 탐험에 나선 상황이었다. Source : National Portrait Gallery
결국 (제임스 쿡 선장의 발견 이후) 보타니베이에 대한 오랜 세월의 침묵을 깨고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영국 총리는 ‘즉각적 행동’을 취했으며, 가능한 이른 시간에 호주에 점령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캐머론-애쉬 연구원은 “바로 이 한 통의 편지로 영국 제1함대 출항이 시작된 것이며, 죄수 수송은 영국의 지리전략을 커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피트 총리의 결정 몇 달 후 필립 선장과 11척의 함대에 승선한, 약 1,400명으로 구성된 제1함대는 영국 남부 포츠머스(Portsmouth) 해군기지를 출발하여 보타니베이로 향했다.
영국의 ‘red herring’
영국이 보타니베이에 죄수 호송선을 출항시킨다는 정보를 확보한 프랑스도 행동에 나섰다. 프랑스 정부는 두 척의 호위함을 끌고 북태평양에 있던 라 페르주 선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영국 함선이 보타니베이로 가고 있으니 곧장 그것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라 페르주 선장은 보타니베이로 가고자 태평양 지역에서의 다른 계획을 취소했다. 다만 그는 (프랑스 식민지를 위한) 보물섬(treasure islands)을 찾고자 항로를 한 차례 우회했다. 문제는 그 보물섬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가 영국 해군 발행의 지도를 사용한 때문이었다.
영국 해군은 이전에 탐험했던 태평양 지역의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는 섬을 의도적으로 포함시켜 놓았다. 캐머론-애쉬 연구원에 따르면 당시 영국 해군은 지도상의 일부 섬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도상의 미존재 섬 표시를 그대로 두었고, 이 지도를 따라 제임스 쿡 선장의 항로를 쫓는 라 페르주 선장에게 ‘red herring’(관심, 주의를 단 데로 돌리게 만드는 것)을 제공했다. 이 때문에 라 페르주 선장은 보타니베이에 도착하기까지 3~4주를 허비했다.
시드니 코브(Sydney Cove)에 상륙한 뒤 영국 국기를 게양하면서 식민지를 선포하는 아서 필립(Arthur Philip) 선장. 식민지 선언과 함께 그는 뉴사우스웨일즈의 초대 총독에 취임했다. 사진 :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라 페르주 선장이 보타니베이에 도착한 것은 1788년 1월이었다. 하지만 영국 제1함대가 먼저 이곳에 도착했고 며칠 전 시드니 코브에 상륙(1788년 1월 26일. 오늘날 호주가 건국일로 기념하는 Australia Day)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라 페르주 선장의 짧은 방문
1788년, 영국에 이어 프랑스인이 지금의 시드니 하버 지역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호주 원주민 다라왈(Dharawal), 에오라(Eora) 부족의 땅을 강제로 차지했다.
필립 선장은 보타니베이에 상륙한 후 약 10일간 주변 일대를 조사한 뒤 북쪽 시드니 코브로 향했고, 뉴사우스웨일즈를 영국 식민지로 선포하면서 죄수 유형지를 세웠다. 또한 필립 선장은 식민지 초대 총독이 됐다.
이런 가운데 제1함대에 패배한 라 페르주 선장은 보타니베이에서 약 6주간 머물며 지금의 리버풀(Liverpool) 지역에 이르는 일대의 지리적 풍경을 조사했다.
영국과 프랑스 탐험선 간의 무력 충돌은 없었다. 필립 총독은 라 페르주 선장을 초대해 만남을 갖기도 했다. 6주 후, 두 척의 프랑스 탐험선은 보타니베이를 떠났다. 이후 이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약 40년 후, 솔로몬 제도의 바니코로(Vanikoro, Solomon Islands)에서 라 페르주 탐험선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프랑스 탐험선이 먼저
도착했다면, 호주 역사는...
만약 라 페르주 선장이 먼저 보타니베이에 도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같은 가정에 대해 캐머론-애쉬 연구원은 “영국이 11척의 배를 갖고 있었고 프랑스는 2척의 호위함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제1함대에 있던 이들의 절반이 죄수였고 완전히 비무장 상태였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백인들의 호주 식민지화는, 이 땅에서 5만 년 이상 살아온 원주민 입장에서는 ‘침략’일 뿐이다. 사진은 제1함대가 입항했던 보타니베이에 만들어진, 호주 원주민 그위갈(Gweagal) 부족이 고기잡이 때 탔던 카누 조형물. 사진 : NSW National Parks and Wildlife Service
1700년대 후반, 영국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지금의 호주 대륙에 대한 결정은 호주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제1함대 이후 영국 죄수선은 계속해 호주로 들어왔고, 죄수와 함께 호주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으려는 영국인들도 속속 도착했다. 이 땅에서 수만 년 살아온 원주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초기 백인들은 갖가지 질병을 퍼뜨렸고 폭력과 압제, 대규모 원주민 토지를 박탈했다.
대재앙이라 할 한 가지 예를 보면, 1783년 시드니에서 발생한 천연두로 인해 이 지역 원주민 절반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찌감치 호주를 발견했음에도 관심 외로 분류했다가 프랑스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내린 영국의 결정은, 그들이 ‘Down Under’라고 부르는 호주 대륙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래 전부터 원주민들은 이를 침략이라 규정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1780년대 중반, 일련의 사건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호주 역사에서 매우 다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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