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공화제 전환 국민투표에서 ‘공화제 지지’ 캠페인을 이끌었던 당시의 말콤 턴불(Malcolm Turnbull). 하지만 ‘호주 수장은 의회에서 지명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실패했다는 분석이다.
ARM 단체 창립 25주년... “의회 대다수가 지지한다” 주장
올해 호주 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단어 중 하나가 ‘오스시트’(Ausexit)였다. 호주 국립 사전연구센터(Australian National Dictionary Centre)에 따르면 이는 ‘올해의 단어’ 후보에 오른 용어 중 하나였다(본지 1224호 보도).
‘오스시트’는 지난 6월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 과반수 이상이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온 이후 호주에서도 영국 여왕의 군주제에서 벗어나 공화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로 급격히 부상한 단어이다.
호주의 공화제 운동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 왔다. 이를 주도하는 ‘호주 공화제 운동’(Australian Republican Movement. ARM)의 최근 수치에 따르면 의회 상하 양원 대다수 의원들의 지지를 끌어낸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주 금요일(16일) 시드니 모닝 헤럴드 보도에 따르면 공화제에 찬성하는 다수 의원들 가운데는 연립 여당 내각의 원로 장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조지 크리스텐슨(George Christensen) 등 보수적 성향의 백벤처(평의원)도 다수가 공화제 지지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공화제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 있는 야당(노동당)의 빌 쇼튼(Bill SHorten) 대표는 말콤 턴불(Malcolm Turnbull) 수상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공화제로 가는 새로운 진전을 만들어내자”고 촉구했다.
지난 주 토요일(17일), ARM 25주년을 기념하는 만찬 행사에서 행해진 턴불 수상의 연설 내용에는 현재 최소 81명의 하원 의원들, 40명의 상원 의원들이 공화제를 선호한다는 구체적인 수치가 언급됐다.
ARM 측에 따르면 하원의회에서 58명의 의원은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거나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이며 현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이들은 11명에 불과하다. 또 상원에서는 21명의 의원이 의사를 밝히지 않은 상태이며 15명의 의원은 현 체제가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결국 상당수 의원들이 공화제를 지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호주 ARM 전국 의장직을 맡고 있는 피터 피츠사이먼(Peter FitzSimons) 대표는 “이 문제에 대해 ‘턴불 수상도 공화제 전환을 호주 국가적 주제로 끌어낼 시기’라는 점을 언급했다”고 말했다. 그는 “ARM 25주년 만찬에서 턴불 수상의 연설이 확정됨으로써 이 문제(공화제 전환 운동)에 대해 그가 근래 보인 침묵을 깨고 새로이 정치적 조명을 받을 기회로 공화제 전환 움직임이라는 이슈를 선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피츠사이먼 대표는 25주년 행사를 하루 앞둔 지난 주 금요일(16일) 페어팩스 미디어(Fairfax Media)와의 인터뷰에서 “다수 대중이 공화제를 원한다”고 언급한 뒤 “내각 장관들도 이를 바라고 있으며 연방 대표자(의원)들도 공화제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보수적 성향을 보이던 ‘크리스텐센 의원의 입장(공화제 지지)은 정치 영역 전반의 우익 쪽에서 나온 결정’으로, 이는 좌-우익의 문제가 아니라 호주가 공화국으로 독립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리스텐센 의원과 함께 보수 진영으로 구분되던 빅토리아 주 디킨(Deakin) 지역구 마이클 서카(Michael Sukkar) 하원의원(자유당), 애보트(Tony Abbott)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빅토리아 주 멘지스(Menzies) 지역구 케빈 앤드류스(Kevin Andrews) 하원의원(자유당)도 공화제에 대한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다.
다만 크리스텐센 의원은 자신의 ‘공화제 지지’ 조건으로 ‘행정부(the executive)와 입법부(the legislature)의 권력분리 일환으로 수상직(prime ministership)을 폐지해야 한다’는 쉽지 않는 조건을 전제로 내걸었다. 크리스텐센 의원은 또한 국민이 선출한 국가 수장을 원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호주의 공화제 전환은 노동당뿐 아니라 변화(군주제에서 공화제로)를 원하는 다수 자유당 의원들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를 안기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공화제로의 전환시 국가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의 문제로, 많은 의원들이 특정 모델을 지지할 것으로 보이지만, 공화제로의 전환을 시도하되 예상되는 경제적 문제를 감안, 현 엘리자베스 2세 여황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내각을 책임지는 의원들 가운데 공화제 지지자는 외교부 줄리 비숍(Julie Bishop) 장관, 에너지 및 환경부의 조시 프라이덴버그(Josh Frydenberg) 장관, 방위산업부(Christopher Pyne) 장관, 국방부 마리스 파인(Marise Payne) 장관, 교육부 사이먼 버밍엄(Simon Birmingham) 장관 등이다.
노동당 쇼튼(Bill Shorten) 대표는 턴불 수상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ARM 25주년 만찬에서의 연설 승낙을 환영하며 “호주 양대 정당 대표들이 호주 국가 수장(영국 여왕이 아닌)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당파를 넘어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쇼튼 대표는 이어 “지난 1999년 국민투표(공화제 전환을 묻는)에서 공화제 전환 시도가 실패했다고 하여 공화제 전환운동을 중단할 수는 없다”면서 “당시(1999년) 국민투표에서 선거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의 자녀가 내년에는 선거권을 가질 나이가 되었으며, 이들 새로운 세대에게 ‘호주의 국가 수장은 호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퀸즐랜드(Queensland) 주 자유국민당 소속의 연방 하원의원이자 보수적 포퓰리스트(populist)로 알려진 크리스텐센 의원은 호주 정부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은 선거(국민투표)뿐이라는 입장이다.
크리스텐센 의원은 “호주를 공화제 국가로 만들기 위한 재추진 작업은 우리 국가 수장이 외국인이 아닌 호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일 뿐 아니라 국민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정부를 개혁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지난 199년 공화제 전환 국민투표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공화제로 제안된 권력 시스템 모델에 대한 공화제 운동가들의 의견 불일치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당시 ‘Yes 캠페인’은 현 수상인 말콤 턴불이 이끌었다. 하지만 이 캠페인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의회가 호주 국가 수장을 지명한다’는 기본적 모델에 국민 다수가 지지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절반 이상의 국민들은 공화제로의 전환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국가 수장’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인해 국민투표에서는 과반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다. 당시 다수 국민들은 자신이 직접 선출하는 수장을 원했음을 간과한 셈이다.
공화제 전환 운동이 성공하려면 국민투표를 통해 각 주는 물론 과반수 이상의 다수 국민들로부터 공화제 전환에 대한 ‘Yes’ 표를 끌어내야 한다. 지난 1999년 국민투표에서는 55%의 국민이 현 체제(군주제)를 지지했으며, ACT를 제외한 대부분 주와 노던 테러토리에서도 공화제 지지가 과반을 넘지 못했다.
지난 2월 페어팩스 미디어와 여론조사기관인 ‘입소스’가 공동으로 진행한 ‘페어팩스-입소스’(Fairfax-Ipsos) 여론조사에서는 42%가 공화제 지지를 표했으며 47%는 ‘반대한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ARM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뒤를 이어 찰스 왕세자가 영국 국왕이 되었을 때 공화제 전환을 시도한다면 51%의 국민이 이를 지지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