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성폭력 종식 운동 시민단체인 ‘EROC’(End Rape on Campus)는 지난 5년간 호주인권위원회(Australian Human Rights Commission)에 공식 접수된 500건 이상의 대학 내 성폭행 및 성추행 관련 신고 자료를 바탕으로 그간 관련 사건들을 미온적 처리한 대학들을 고발했다. 사진은 ‘EROC’ 설립자 샤나 브렘너(Sharna Bremner)씨.
실태 알고도 무시...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가벼운 조치’로 마무리
지난해 상반기, 호주 각 대학 내 성폭력 문제가 본격 제기된 가운데 대학들이 성폭력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은폐’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교내 성폭력 종식 운동 시민단체인 ‘EROC’(End Rape on Campus)는 지난 5년간 호주 인권위원회(Australian Human Rights Commission)에 공식 접수된 500건 이상의 대학 내 성폭행 및 성추행 관련 신고 자료를 바탕으로 그간 교내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들을 미온적으로 처리한 대학들을 고발했다고 금주 월요일(27일) 시드니 모닝 헤럴드가 보도했다.
2010년에서 2016년 사이, NSW 주를 비롯해 ACT, 빅토리아, WA 주 소재 대학에서 발생한 153건의 성추행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고 성폭행은 145건에 달했다. 그러나 이 중 겨우 6명의 가해자만이 퇴학 조치를 당했을 뿐이다.
이번 보고서는 호주 주요 상위권 대학에서 발생한 끔찍하고 참혹한 성폭행 사례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엘리자베스 브로데릭(Elizabeth Broderick) 전 성차별 위원장(sex discrimination commissioner)을 영입했던 시드니 대학교도 포함되어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호주 인권위원회에 접수된 가장 최근 사례로는 지난해 6월 ‘언어적 성폭행’ 사건도 있다. 피해자들은 ‘캐스크 와인’(Cask wine)을 ‘창녀 주스’(slut juice)라고 칭하는가 하면 ‘oval’(호주식 풋볼 경기장)을 ‘강간 경기장’(rape oval), ‘주택지’(residential quarters)를 ‘창녀 골목‘(slut alley)이라 부르는 등 언어폭력이 난무했다고 주장했다.
뿐 아니라 대학 캠퍼스 내에서 기숙사 방문을 노크하는 남학생에게 여학생이 문을 열어주면 성관계에 대한 동의로 간주하는 행위를 ‘rockspidering’이라 칭하기도 했다.
2016년 시드니 대학교는 교내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조치 일환으로 엘리자베스 브로데릭(Elizabeth Broderick. 사진) 전 성차별 위원장(sex discrimination commissioner)을 영입했으나 큰 실효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대학교에서는 항문 성교(anal sex) 경험이 있던 한 유학생이 네 발로 엎드리도록 강요받았고, 세 명의 한 남학생들이 손과 발 및 등에 올라타 성관계를 하기도 한 사실이 신고됐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이 피해 여학생은 ‘no’는 ‘하겠다’는 뜻이고 ‘yes’는 ‘항문성교’로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했다. 자료에 따르면 피해 학생이 학교 측에 이 같은 사실을 신고했으나 두 가해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 배정되기도 했던 것도 드러났다.
맥콰리 대학(Macquarie University)의 캐서린 럼비(Catharine Lumby) 교수는 “그간 대학들은 캠퍼스 성폭행 문제를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았으며, 아주 오랜 시간 관련 사실을 적극적으로 은폐하면서 무책임하게 다뤄왔다”고 꼬집으며 “이번 자료는 대학 캠퍼스 내 성폭행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럼비 교수는 이어 “이 같은 보고서를 통해 대학의 소홀한 학생관리 실태를 알리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자료는 성폭행 가해자들을 가벼운 처벌로 처리한 각 대학의 실태도 드러냈다. 뉴잉글랜드 대학교(University of New England)는 가해 학생에게 단 $55의 벌금과 8시간의 봉사활동, 피해 학생에 대한 사과 편지 한통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동 대학의 아나벨 던컨(Annabelle Duncan) 부총장은 페어팩스 미디어(Fairfax Media)를 통해 “과거 교내 학칙으로는 성추행 관련 특정 사례를 징계하는 데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그녀는 “UNE는 이 사건 이후로 당시 학칙을 재점검하고 전면 개정했다”고 밝혔다.
호주 ‘강간 및 가정폭력서비스’(Rape and Domestic Violence Services Australia) 위원이기도 한 럼비 교수는 이와 관련해 “학교 내 정책들은 일관성이 없고 불분명하며 피해자들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치료에 대한 준비가 없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한편 호주 대학연합인 ‘Universities Australia’의 CEO 벨린다 로빈슨(Belinda Robinson)씨는 “최근 호주 대학들이 ‘Respect. Now. Always’라는 슬로건으로 성추행 방지대책에 본격 착수했다”며, “용기를 내어 설문조사에 참여하고 인권위원회에 사례를 접수한 학생들에게 감사한다”고 전했다.
이번 보고 자료는 학교 측이 지정하고 있는 불만신고 접수 기간이 짧다는 문제도 지적했다. 호주 가톨릭대학교(Australian Catholic University)의 경우 공식 불만사항 신고 기간을 사건 발생 후 20일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가 사건을 신고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이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고 진단했다.
맥콰리 대학(Macquarie University)의 캐서린 럼비(Catharine Lumby) 교수. 그녀는 “그간 대학들은 캠퍼스 성폭행 문제를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은 채 오랜 시간 적극적으로 은폐하는 등 무책임하게 다뤄왔다”고 주장했다.
동 대학교의 부학장인 스태판 웰러(Stephen Weller) 박사는 “피해 학생들이 아무 때나 신고할 수 있도록 관련 정책을 검토하고 규정을 개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료는 또한 대학 측의 태도도 비난했다. 시드니 공과대학교(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UTS)의 셜리 알렉산더(Shirley Alexander) 부학장은 지난해 발생한 교내 성폭행 사건 보도와 관련,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가해자의 벌금은 형사법에 근거해 결정된 것이며 대학이 결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웨스턴시드니대학교(Western Sydney University)의 마이클 살터(Michael Salter) 조교수는 ‘기관배반’(institutional betrayal, 조직 및 국가기관이 구성원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피해자들에게 장기간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한 건강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언급하며 “대학들이 책임을 지고 교내 성폭행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인권위원회에 접수된 교내 성폭행 사례들
-한 성폭력 피해 여학생은 대학교 상담센터에서 눈을 감고 일어난 일을 그려보라고 지시받았다고 주장했다. 학교 측 대변인은 이것이 학교 관행에 어긋나는 것임을 인정했다.
-멜번 대학교(Melbourne University)의 한 학생은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학장에게 신고했으나 학장은 ‘강간’(rape)이라는 단어는 “너무 강하고 선동적”이라고 말한 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극단적인 방법이며, 이런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신고했다. 학교 측 대변인은 관련 사건에 대해 답변을 거부했으나 학생들에게 성추행을 당했을 경우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NSW 주 소재 한 대학에서 피해를 당한 학생은 서로 다른 대학 10곳의 직원들에게 관련 사실의 자세한 사항을 알렸지만 아직도 교내 성폭행 및 성추행 관련 정책에 근거한 해결 방안을 어느 곳에서도 통보받지 못했다고 제보했다.
■ 호주 대학별 성폭행 사례 건수
(575건 신고사례 중 6명 퇴학 처리)
-성폭행 불만접수 건수: 575
-신고된 성폭력 건수: 145
-경찰에 보도된 건수 : 153
-퇴학 : 6
Source: FOI End Rape on Campus Australia
■ 성관계에 관한 남학생들의 의식
(남학생 5명 중 1명, ‘여학생 향한 성적 위협 괜찮다’ 여겨)
-강제 성관계 괜찮다 : 25%
-술 취한 여성 함부로 다뤄도 괜찮다 : 37%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성은 함부로 다뤄도 괜찮다 : 27%
Source: Our Watch, 2016 survey
김진연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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