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호주 원주민 병사들의 편지가 속속 발굴되고 있다. 사진은 프랑스 서부전선에 배치된 한 병사가 호주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이 땅(전장)에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간단하게 알립니다”
속속 드러나는 원주민 참전 병사들의 편지, 유머와 깊은 슬픔 담겨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년 후 호주와 뉴질랜드 군으로 급조된 안작부대(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ANZAC)의 갈리폴리(Gallipoli) 도착(1915년 4월25일)을 기해 시작되어 모든 전장에서 희생된 호주 군인들을 기리는 안작데이(ANZAC Day) 행사가 금주 화요일(25일) 호주 전역에서 진행됐다.
영국의 요청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상륙작전에 투입된 안작부대 병사들은 영국군 사령부의 무리한 작전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수개월 이어진 작전 전개 후 후퇴를 결정했을 때, 호주-뉴질랜드군에 남은 것은 8천명 이상의 전사자에 나머지 대부분이 부상이라는 참담함이었다.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터키 작전 실패 후 호주군은 다시금 당시 전쟁의 최고 분수령이라 할 만한 프랑스 서부전선(Western Front)에 배치되어 주요 작전을 수행하면서 또 한 번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안작부대의 갈리폴리 작전 투입 1년 후인 1916년, 시드니를 비롯해 호주 주요 도시에서는 갈리폴리 반도에서 전사한 안작부대 병사들을 기리는 행사를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모든 전장에서 전사한 호주군을 기리는 현충 행사로 발전했다.
원주민 병사들의 서신,
짧은 문장에 깊은 슬픔 담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호주 병사 가운데는 원주민 젊은이들도 있었다. 올해로 터키 갈리폴리 반도 도착 102년이 되는 안작데이를 기해 금주 월요일(24일) ABC 방송은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원주민 병사들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발굴, 그 안에 담긴 이들의 유머와 슬픔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원주민 병사의 편지는 극히 드물다. 아울러 이 전쟁의 원주민 참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들이 전장에서 보내온 편지는 이들의 희생, 또는 전쟁이라는 정서적 비용 이상으로 직접적인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간결하게 쓰여진 이들의 편지나 엽서에는 원주민 병사들의 허세, 슬픔, 때론 유머가 담겨 있다. 또한 냉정함(또는 태연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절제된 표현이 특징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역사학자인 필리파 스칼렛(Philippa Scarlett)씨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원주민 병사들을 조사해 왔다.
그녀는 소위 ‘Protection Era’(호주 정부가 원주민이 교육, 결혼, 주거 등을 법으로 통제한 시기)에 이들에게 제공된 교육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원주민 호주 병사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호주 제15대대 소속으로 전장을 누볐던 사무엘 브라우닝 이병. 어부였던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선한 굴이 먹고 싶다고 쓰기도 했다.
1917년 5월, 원주민의 호주군 복무 금지 규정이 폐지되었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다수의 원주민 청년들이 호주군에 입대해 있던 상태였다.
그런 원주민 병사 중 하나인 사무엘 브라우닝(Samuel Browning)은 NSW 주 노스 코스트(North Coast)의 ‘핀갈’(Fingal. ‘동굴’이라는 의미)에서 온 어부 출신이었다.
브라우닝의 친구 한 명도 브라우닝과 함께 군 입대에 자원했지만 그의 친구는 유럽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브라우닝은 1917년 말 군함 ‘에우리피데스’(Euripides) 호에 승선, 이듬해 1월26일(Boxing Day) 영국 남부 데본포트(Devonport)에 상륙했다.
서부 전선의 총성이 멈추기 몇 달 전인 1918년 8월, 프랑스 북부 루앙(Rouen)에 배치되어 있던 브라우닝이 어머니 매리(Mary)씨, 아내, 10살 위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프랑스 서부전선의 무시무시한 공포나 참호에 살포됐던 독가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 부상을 입은 그가 바스(Bath. 영국 Somersetshire의 온천 도시)의 군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당시, 그는 남동생이 고향인 ‘핀갈’을 떠날까 불안해 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또 다른 편지에는 그가 해변을 갈망하는 내용도 나온다. 고향인 ‘핀갈’에서 어부로 살아왔던 탓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서부전선에 배치되기 전인 1918년 2월, 영국 코드포드(Codford)에 자리한 안작부대 훈련소(ANZAC training camp)에 있을 당시 브라우닝은 어머니에게 “신선한 굴(oyster)과 핍 파이(pippie. 일부 과일의 씨앗을 재료로 만든 파이)가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쓰기도 했다.
찰스 블랙맨(Charles Tednee Blackman) 상병은 원주민 참전용사 중 가장 많은 편지를 남겼다.
전선의 비 내리는 풍경...
총격 소리를 천둥에 비유
그런 한편 호주군 제9대대에 소속되어 있던 원주민 출신 찰스 블랙맨(Charles Blackman) 일병이 브리즈번(Brisbane) 북서부 비겐든(Biggenden)의 한 목장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훨씬 더 차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찰리’(Charley)로 불렸던 블랙맨 일병의 3형제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호주 제국군(Australian Imperial Force. AIF)에 근무했다. 그중 알프레드 블랙맨(Alfred Blackman)은 1917년 말 파스샹달 전투(Battle of Passchendaele)에서 전사했다.
그의 구술로 누군가 대신 쓴 것일 수도 있는 찰스 블랙맨 일병의 편지는 호주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기록보관소에 있으며, 종종 ‘외로운 병사’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몇 안 되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원주민 병사의 편지나 엽서 중 블랙맨 일병의 서신은 전장에 대해 가장 자세한 묘사를 담고 있다.
그의 서신 중에는 “네가 알았으면 하는 것은, 전선의 마지막 전투에서 내가 다섯 명의 독일군을 쏘았다는 거야”(I expect you know it. The last time up the line, I killed five Germans)라는 문구가 있으며, 또 다른 편지에서 이 외로운 병사는 “프랑스는 아름답지만 너무 자주 비가 내려”라며 서부전선의 스산한 날씨에 불평을 털어놓기도 한다.
중동 지역에 배치됐던 프랜시스 월터 버티 퍼스(Francis Walter Bertie Firth)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때로 그는 “아직 살아 있다”고 간단하게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또 “여기, 짙은 먹구름은 결코 천둥소리를 낼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난무하는 총소리가 천둥소리를 대신하며 총구의 번득이는 빛은 번개와 같거든”이라고 쓴 서신도 있다. 전장의 참혹한 풍경을 그는 이처럼 유머러스하게 담아낸 것이다.
중동 지역에 배치됐던 프랜시스 월터 버티 퍼스(Francis Walter Bertie Firth. 그는 는 함께 참전한 동생을 이집트 전투에서 잃었다)는 ‘프랑스의 어딘가’에서 쓴 편지에서 NSW 주 북부 필리가(Pilliga)에 있는 어머니 케이트(Kate)가 자신에게 분명 서신을 보냈지만 받지 못한 데 대해 큰 걱정을 드러내고 있다.
버티는 1917년 부활절을 기해 어머니에게 “이 땅(전장)에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간단하게 알립니다”(Just a few lines to let you know that I am still in the land of the living)라고 썼다.
버티 퍼스가 쓴 모든 편지의 특징은 자신이 전장에서 살아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고향의 가족들을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또 다른 편지에는 그가 자기 연인을 ‘버렸음’을 알게 해 주는 문구도 있다. “어느날 페기(Peggy)로부터 서신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과 약혼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행운을 빈다”라고 쓴 것이다.
포로가 된 원주민 병사
고향 그리는 내용도
호주 원주민 병사들의 편지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1918년 시드니 신문에 소개된 것이 아닐까 한다.
1916년 입대한 뒤 이듬해 프랑스 북부 리앙코(Riencourt)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더글라스 그란트(Douglas Grant)는 프러시아 비텐베르크(Wittenberg. 현 독일 작센의 도시 명)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그란트는 비텐베르크에서 쓴 편지를 통해 “포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내고 있다”면서 “상황이 허락하는 한 편하게 지내려 한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매일 일을 하며, 집이 몹시 그립지만 조만간 돌아갈 것으로 기대한다. 걱정하지 마시기를...”이라고 전했다.
호주 원주민 병사로는 호주 제국군(AIF)에 소속되어 가장 먼저 파병된 것으로 알려진 더글라스 그란트. 그는 참전 1년 만에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는 “내가 서신을 받으면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한다. 아버지는 내가 편지를 받는 것이 어떻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진정 이해할 수 없다”며 평범하지 않은 문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편지들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모든 통신문을 검열한 독일군의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호주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란트가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동봉한 그의 사진(비교적 건강해 보이는)도 당시 시드니에서 발행되던 ‘시드니 메일’(Sydney Mail)에 게재됐다.
ABC 방송은 몇몇 원주민 병사들이 전장에서 보낸 편지 내용을 소개하면서, “전쟁 후 100년 뒤에 등장한 이 서신들은 호주 원주만 참전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전했다.
필리파 스칼렛씨는 “원주민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위해 할 수 있는 더 많은 일이 있다”면 “이들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것이 그 작업의 하나이며 이 일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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