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95-96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발을 디디면 먼지가 구름처럼 올라오는 메마른 대지를 끝없이 달린다. 우리는 이 푸석푸석한 대지 위에 살을 부비며 살면서 서로에게 먼지가 될지언정 비처럼 아련하게 스미지 못한다. 늘 단비를 그리워하며, 가슴에 젖어드는 비를 맞아보지 못하고 메마르게 살아가고 있다. 가슴엔 아주 오래 꽃을 피우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꽃을 피워보지 못했다.
실크로드! 그 이름과 역사만으로도 나그네에게 묘한 설렘과 도전과 모험을 떠올리게 하는 길이다. 지난날 실크로드를 방울소리 울리며 지나다니던 카라반의 긴 행렬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지만, 비단을 싣고 사막의 밤하늘별을 보며 먼지를 일으키며 더 나은 삶을 위해 긴 여행을 떠나는 그들 발자취를 더듬어 달리는 길에는 그들 숨결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어쩌면 나그네에게 아름다움이란 절경의 산세나 계곡, 기암괴석에만 있지 않고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에 있을 수도 있겠다.
아마도 사막은 한발이라는 여신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 같다. 한발의 다른 이름이 가뭄이다. 중국의 신화에는 푸른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신이 등장한다. 이 여신은 황제와 치우(蚩尤)가 맞붙었던 탁록의 전투 때 황제의 부름을 받고 천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황제를 도와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시켜 일으켰던 폭풍우를 강력한 빛과 열로 날려 보내고 황제 승리의 일등공신이 된다. 그녀는 이 싸움에서 지나치게 힘을 쓴 탓에 다시 천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로부터 지상에는 심각한 가뭄이 들게 됐다. 그녀의 이름이 한발이고 물론 이 치우는 우리의 붉은악마의 상징이 맞다.
황량한 사막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바리쿤을 향해 산길을 넘고 있을 때였다. 해발 2천m가 넘는 이곳은 바람이 아주 심한 곳이다. 어느 곳이나 성질이 다른 두 기압이 만나면 바람이 심하게 분다. 투루판의 더운 공기와 바리쿤의 시원한 공기가 만나 일어나는 바람이 맞바람이 되어 고단한 발걸음을 더욱 고단하게 만든다. 지금껏 사막에서 만나 비라야 ‘호랑이 시집가는 비’ 정도였는데,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비 때문에 앞으로 헤쳐 나가기가 만만치가 않다. 우비를 찾아 입었지만 갑자기 떨어진 기온을 감당할 수 없어서 다시 옷을 찾아 안에 덧입었다.
비가 내리자 메마른 대지 위에서 환희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시들어가던 풀들이 어깨를 활짝 벌리고 꽃봉오리를 피워내고, 그곳을 한가로이 노니는 야생 낙타와 말과 소, 양들이 즐거워 춤을 추는 듯하다. 어디서 왔는지 새들이 짹짹거리며 날아든다. 물을 머금을 초목이 없는 사막에 큰비가 오면 홍수가 나기 쉽다. 조금 대지를 적시는가 싶으면 바로 물줄기가 꽐꽐 쏟아져 내린다. 사막에서 비가 내리면 바싹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중국인들에게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은 구름과 바람을 일으키고 천둥, 번개를 자유자재로 부려 비를 내리는 신통력이 있다. 용이 웬일로 이 사막을 지나갈까? 농사를 주로 짓던 중국인들이 최고로 치는 인생의 네 가지 기쁨이 있다. 그 첫째가 오랜 가뭄 끝에 만나는 단비이다. 그리고 머나먼 타향에서 오랜 친구와 만나는 것이다. 세 번째가 신혼 첫날 방에서 타오르는 촛불이고, 그 다음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이다.
연일 계속되는 사막 열기 속에 기진맥진한 내게 하늘이 용을 보내주어 비를 뿌려주니 내게는 첫 번째 큰 기쁨이 된다, 외로움 속에 달리는 사막에서 맞는 단비가 오랜 친구 같이 다정하게 느껴지니 그 또한 기쁨이다. 비에 젖어 생기가 돋는 대지가 첫날밤 새색시처럼 아득하니 이 또한 내게 큰 기쁨이고, 이 길을 달리며 평범하고 찌질하던 내 삶이 평화 마라토너로 거듭났으니 어찌 과거에 급제(及第)한 것에 비하겠는가?
투루판에서 하미로 가는 길을 바리쿤을 거쳐 가는 길을 택했다. 투루판이 해수면보다 낮은 도시라면 바리쿤은 해발 2천m가 넘는 고산지대의 초원이다. 주위의 다른 도시들이 다 열사의 더운 바람으로 숨이 꽉꽉 막힐 때도 이곳만은 시원한 바람이 분다. 어떤 이는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는 이도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리쿤 호수를 끼고 펼쳐지는 초원은 그 푸르름만으로도 눈이 부시다. 이곳에서는 내가 그렇게 무겁게 느꼈던 절망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운 지, 내가 그렇게 작게 보았던 희망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극명하게 보인다.
바리쿤은 동 톈산 분지에 자리 잡은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보았음직한 호반의 초원 도시이다. 한때 양과 조랑말의 천국이었다. 포류국(浦類國)이 있었다는 한대(漢代)나, 명대(明代)에는 서 몽골의 천막이 호수를 빙 둘러 싸여있었고, 한때 4만 마리 군마를 공급했다던 청대(淸代)의 토성이 지금 도심 한가운데 무너진 채 자리하고 있다.
나는 사막을 달리면서 태양과 달리기 경주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태양이 저쪽 동쪽 끝에서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시작하면 태양이 기승을 부리는 한낮의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끝마치려 열심히 달린다. 하루에 내가 마시는 물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과보가, 지는 태양과 달리기 시합을 하다 마신 물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많다. 그야말로 마시고는 가도 짊어지고는 갈 수 없을 만큼의 물을 마셔댄다.
중국에는 태양과 달리기 경주를 하는 거인 과보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는 지는 태양을 쫒아가 보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달렸다. 천리를 달린 그는 태양이 지는 우곡이라는 곳까지 달렸지만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황하와 위수의 물을 다 마셔버렸다. 그러나 그 물은 거인 과보에게는 접시 물에 지나지 않았다. 갈증(渴症)이 가시지 않은 그는 북쪽의 바이칼 호수의 물을 마시기 위해 달려가다 너무나 지쳐 쓰러져 죽었다. 그가 죽은 자리는 커다란 복숭아나무 숲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중국인들마저 연관 지어 상상하지 못하지만 거기가 바로 무릉도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태양을 쫒아 달리다 목이 타 죽은 자리에 생겨난 복숭아나무 숲. 나의 태양은 평화이다. 평화를 쫒아서 지금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만약 황하의 물이 다 말라 없어졌다는 소리가 들리거든 내가 다 마시고 평양을 향해 달려가는 줄 알아라! 나는 결코 과보처럼 쓰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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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발바닥이다
평화는 발바닥에서 온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을 열고 길을 나서야 한다. 이제 길을 나선지도 10개월이 지났고 15개국을 지나서 1만 km를 넘게 달려왔다. 육신은 피로가 누적되고 마음엔 저 멀리 보이는 설산(雪山)의 눈처럼 고독이 쌓여간다. 어떨 때는 육신이 너무 힘들어 처음 문을 열고 나설 때의 의지가 무엇이었는지조차 삼삼할 때가 있다.
달리기는 내게 교통비를 요구하지 않는 무료 여행수단이어서 달리면서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다. 달리기는 내게 깊은 산속의 천년사찰이어서 나는 달리면서 도를 닦고, 조용히 명상을 하며 마음의 침잠(沈潛)을 얻는다. 달리기는 나의 연구소이기도 하다. 달리면서 나는 세상 이치를 배우고 삶에 내재된 복잡한 구조를 연구를 한다.
달리기는 나의 최고의 사교장이기도 하다. 달리면서 세상의 모든 인종과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하고 소통한다. 세상을 밝게 바라보는 창문이기도 하다. 그 창문을 내다보면서 꿈을 키워왔다. 달리기는 내게 젊음을 되찾아주는 회춘제이고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보약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게 절대고독을 안겨준 얄궂은 연인이며 기쁨과 환희를 가져다준 사랑스런 요부(妖婦)이기도 하다.
달리면 우뇌가 열리고 감각이 열린다고 한다. 유라시아를 품에 안으려면 우뇌의 도움이 필요하다.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우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대 서양문명의 근간(根幹)인 논리적인 사고는 좌뇌에 의해서 발달해왔지만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협소화 시켰는지 우리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이분법적인 사고가 내가 아니면 남이라는 편 가르기의 폐단을 조장해왔다. 우뇌가 발달하면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열리고 통합적이며 창조적인 사고를 하게 한다.
마라톤에는 필연적으로 고독이 내재되어 있다. 사람은 고독하다는 정설은 달릴 때에 더 실감나가 다가온다. 여럿이 함께 어울려 달릴 때에도 우리는 남해바다의 다도해처럼 서로는 독립적이다.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떠있는 섬이나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 중의 하나나 섬은 다 똑같다. 나는 뛰면서 홀로서기에 성공했고, 뛰면서 뜨거워진 심장으로 사람들과 통하는 터널을 발견했다. 유라시아의 드넓은 대륙을 달리며 이렇게 처절하게 외로워 본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사랑을 할 줄 안다. 지지고 볶는 사랑이 얼마나 구수한 사랑인지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달리기는 내게 큰 마이크를 선사하여 나는 그 마이크를 통하여 ‘평화통일’을 노래하게 되었다. 도무지 박자와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이지만 ‘평화통일’에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대륙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에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유라시아’라는 스튜디오는 얼마나 시설이 좋은지 박자 음정 안 맞아도 ‘평화’라는 좋은 소재로 노래를 부르는 나를 감쪽같이 포장을 해주었다.
얼마 전 샤워를 하면서 거울에 비춰진 내 상체에 또렷이 새겨진 한반도의 모습에 내 자신도 놀랐다. 한반도기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열 달을 매일 달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정성을 다해 매일 반복하면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한걸음에 60cm의 작은 보폭으로 1만km를 넘게 달려왔다. 남북 모든 시민들이 간절하게 염원하면 내 가슴에 한반도가 새겨지듯이 지구의 한복판에 새겨진 한반도는 평화의 횃불로 온 세상을 비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우연히 바라본 내 발이 참으로 이쁘고 고맙다. 1만km를 넘게 달려온 발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웬만한 여자들 발보다 더 곱다. 내 발이라서 더 그럴 수도 있지만 매일 한 발자국 뛸 때마다 내 몸무게의 3배의 충격을 그대로 묵묵히 받아들이고 이겨낸 고마운 발이 뽀송뽀송하면서도 곱다.
박지성이나 김연아의 발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내가 발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매 쉬는 시간마다 네 켤레의 운동화를 갈아 신고 양말을 갈아 신은 것 밖에는 없다. 우리가 흉보는 중국 사람들조차도 내가 식당에 들어가서 양말을 벗고 신발을 벗은 채 있으면 뭐라고 한다. 본의 아니게 한국사람 욕을 먹이게 한 점은 사과해야겠다. 박노해의 ‘사랑은 발바닥이다.’라는 시가 생각난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며, 발바닥이 가는 대로 사람들을 만나며 신장위구르의 마지막 도시 하미를 지나고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이 ‘지옥의 터널’ 같은 곳을 빠져나가게 되었다. ‘지옥의 터널’이라고 쓰면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느낀 감정은 그렇다. 사람들에게서 느낀 것이 아니라 이곳의 척박한 환경과 공안(公安)들의 지나친 간섭이 불편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신장위구르 지역은 슬픈 지역이다. 자연환경이 척박하여 슬프고, 그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며 수만 년 조상대대로 뿌리내리며 살아온 그들의 숨결이 슬프다.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해서 슬프다. 주위의 다른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의 국가들이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독립될 때 잠시 꿈을 꾸었지만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에서도 이 지역은 1759년 청나라의 지배를 받은 이래 티베트와 함께 독립을 추구해온 지역이다. 내 발바닥이 한 달여 지나온 이 지역에 축복 있으라!
‘평화는 발바닥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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