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05-106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오늘은 우웨이(武威)에서 하루 쉬었다. 이곳도 실크로드의 중요도시이고 역사도 깊어서 유적지도 많지만 나가서 구경할 기력이 없다. 하루 종일 잠자리에 누워있어도 도무지 몸이 상쾌하지 않다. 푹 하루 종일 자고나면 좋겠는데 온 몸이 각성(覺醒)이 된 상태라 잠도 깊이 안 든다. 나가서 밥 사먹는 것도 귀찮아서 호텔방에서 아침은 라면 점심은 지난번 교무님들이 사온 곰탕국물을 데워 먹었다. 한 일주일 쉬면 좀 나으려나 모르겠다. 아마도 석 달 열흘은 쉬어야 좀 피로가 가실 것 같다.
우웨이는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주요길목이다. 이 길목을 장악하는 민족이 서역과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쟁 끝난 뒤에는 이긴 쪽의 문화와 종교가 이곳에 펼쳐진다, 그래서 이곳은 인종과 문화와 종교의 전시장이 되었다. 서방 문화와 북방문화, 중화와 혼합되어 실크로드의 문화를 역사적으로 잘 보전하고 있는 곳이 우웨이 지역이다.
'뢰대한묘(雷台汉墓)'는 원래 천둥의 신에게 제사지낸 곳이었다는데 1969년 뢰대고묘(雷台古墓)에서 동한 시기 청동 천리마 형상의 문물인 마답비연(马踏飞燕)이 출토되었다. 후한의 땅 무위의 북쪽 레이타이(雷臺) 지역의 묘에서 1969년 공사를 하던 중 청동마상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선두의 말이 제비를 뒷발로 밟고 나르는 모양의 마답비연(馬踏飛鳶)상이다, 이 비마(飛馬)가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라는 국가전략 아래 웅비하는 현대 중국의 상징이 된다.
말은 오늘날 지구를 하나의 마을처럼 만든 정보 통신 혁명과 같은 것이었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 대륙간탄도비사일 급 무기였다. 몽골은 800년 전에 인터넷 네트워크대신 말이 달리는 그물망 같은 네트워크를 완성해 유라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였다. 장건은 서역을 여행한 후 천리마라고 하는 한혈마(汗血馬)를 발견하고 한 무제에게 보고했다. 한혈마는 키가 크고 힘이 센 말로서 천마(天馬)라고도 하는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우수한 말인데, 흉노에게 시달리던 한의 무제는 이 한혈마를 탐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 무제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대완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한의 사신들의 오만한 태도에 대완국의 왕은 대노하여 제의를 거절하고 되돌아가는 사신을 습격해 참살하고 대완마를 사기 위해 보냈던 보물도 빼앗아버렸다. 한 무제는 이에 기원전 104년 이사장군 이광리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보내 대완을 정벌하고 마침내 한혈마를 얻게 되었다. 한 무제는 한혈마를 얻은 후, 감탄하여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짓게 하였으며, 한혈마를 천마(天馬)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뢰대한묘(雷台漢墓)에서 나온 청동으로 된 마답비연(馬踏飛燕)은 이 한혈마를 모델로 만들었다. 말이 제비를 밟고 하늘을 나는 듯하다고 마답비연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관우의 명마 적토마(赤兎馬)도 이 한혈마의 일종이다. 삼국지나 옛 중국영화를 보면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쌍방의 처참한 피해를 피하기 위하여 장수끼리 일합을 겨루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무술이 우수한 장수보다 훌륭한 말을 탄 장수가 백번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웨이는 고구려 출신 당의 장군 고선지(高仙芝)가 자란 곳이기도 하다. 그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唐)나라 장군이다. 고선지는 스무 살 때 장군이 되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에 의해 AD 668년 패망하고 만다. 당은 고구려의 지배층과 백성 3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사막 지역 우웨이로 강제 이주시켜 버린다. 소련이 1937년에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20만 명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과 동일하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군에 편입되어 하서군의 4진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어려서부터 사막 지역에서 자란 고선지는 당 나라에서 사막전과 고산 전투의 최고 전략가가 된다. 서역 원정에서 보여준 고선지의 뛰어난 군사 전략은 후대에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741년 톈산 산맥 아래에 위치한 달해부(達奚部)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고선지는 2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그는 비단길과 서역 지역을 관리하던 안서도호부에서 두 번째로 지위가 높은 장군이 된다. 그는 서역을 경략(經略)하고 지금의 우즈벡키스탄 아프가니스탄까지 두 번씩이나 진출한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최고사령관이 된다.
고선지는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그는 이 마침내 파미르를 넘어 지금의 파키스탄 소발률국은 물론 서역 일흔두 개 나라에서 항복을 받아 내었다. 고선지의 승전 소식에 당나라의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천축국(天竺國)까지 진출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가 당대 최고의 전략가이며 용장이었겠지만 그가 탄 말이 한혈마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가 얼마 전까지 밀고 다니던 유모차의 이름도 나는 한혈마라고 붙였다.
내가 떠나기 직전 2017년 8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전 세계가 지금껏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중장거리 전략 탄도미사일 화성 12형으로 괌도 주변에 대한 포위 사격을 단행하기 위한 작전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공포 속에서 남북한 시민들은 살아야했다. 그것이 어떻게 남북한 시민뿐이었겠는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소름이 확 끼친다.
이때 나는 두 지도자가 전면전이 야기할 쌍방의 처참한 피해를 피하기 위해 말을 타고 무림의 결투를 하던지 황야의 결투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치사하게 서로의 시민들의 등 뒤에서 변죽만 올리면서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지 말고 무림의 대결을 한다면 관우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나 여포의 방천화극(方天畵戟)을 들고 일합을 벌이던지 황야의 결투를 벌이려면 스미스&웨건 M66 권총을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한판 승부를 벌인다면 세계적인 이벤트로 오히려 환호를 받았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기면 북한이 핵 폐기 먼저하고 평화협정 조인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이기면 평화협정 먼저하고 미군철수하고 핵 폐기하면 될 것이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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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미니스커트
“보배씨 사랑합니다”
슬픔에 옳고 그름이 없다. 눈물만큼 순수하고 빛나는 것이 어디 있으랴! 이유 없어도 우는 사람 옆에만 있어도 눈물이 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남의 슬픔을 조롱하지 마라! 얼음을 부수고 길을 만드는 쇄빙선(碎氷船) 같은 숭고한 삶을 살다가 한 순간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휩쓸려간 뜨거운 사내를 생각한다. 황량한 벌판에 내 눈물 몇 방울 떨구어야 비옥해지지 않는다. 눈물이라도 흘려 떠나는 그를 마음으로 안고 보내야 했다.
눈물을 흘리고 닦으려하니 또 눈물이 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숭고한 삶을 살다간 분만큼이나 눈물이 난다. 내게는 어머니만큼 숭고한 사람은 없다. 작년 이맘때쯤 길을 나설 때 어머니 때문에 발길이 무거웠다. 늙고 힘없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는 마음이 아팠다. 내가 나가있는 동안 어찌될까 늘 노심초사(勞心焦思)했다. 이제 같이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왜 나는 좀 더 일찍 철이 들지 못했을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만이라도 아무 일 없기를 늘 기도했다.
어머니는 나의 힘의 원동력이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어머니가 보여주었던 그 강인함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군대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면 운명보다 질기게 늘 함께했던 분이다. 그래서 이번 여정도 웬만하면 같이 하고 싶었다. 차량지원이 될 때부터라도 어머니와 긴 여행을 함께 하며 어머니와의 시간을 장식하고 싶었다. 그마저도 어머니는 감당할 건강이 아니었다. 그렇게 강건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베이징에 도착할 무렵 잠깐 왔다 가시라고 했더니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사막이 황량하지만 이 황량함이 감정을 비옥하게 해준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앞에 서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 그 어는 곳보다 깊고 넒은 푸른 하늘 아래 서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 서면 일상에서 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축복이었던지 알게 된다. 생명 없는 곳에서 생명의 소중함에 감사기도를 올린다. 나아주시고 길러주시고 60이 넘도록 까지 함께하여 주심에 어디 하나 숭고한 정신이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눈물이 난다.
오늘은 몇 년 전 어떤 신문에 기고했던 ‘어머니의 미니스커트’란 글을 되새기면서 눈물을 조금 더 흘려야할 것 같다. 어머니의 다리가 곱고 힘이 있을 때 함께 여행을 맘껏 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가 아직도 엄마라고 부르는 어머니란 숙녀분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도 잊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이름도 잊고 산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또 할머니로서 살고 있다.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해변대보다도 무섭고 거칠다는 대한민국 아줌마로 살아왔다. 이제 이 숙녀 분은 거울도 안보는 여자가 되었지만 나는 안다. 여자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 게 아니라 가슴에 묻었을 뿐이라는 것을!
눈부신 햇살 아래 빨간 백합의 향기는 흐드러지는데 고단한 어머니의 다리가 나를 슬프게 한다. 어머니도 한때는 미니스커트가 어울렸을 때가 있었다는 기억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쭈그러들고 고단한 어머니의 다리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 죄스러워 애써 피해왔던 것 같다. 그 무렵 미니스커트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 헐렁한 치마를 입기 시작할 때에도 나는 내 청춘을 앓느라 눈치 채지 못했고 자식들을 돌보느라 당신의 몸은 돌보지 못해서 치마의 치수가 늘어나는 것을 서운해 할 때도 나는 내 등 뒤에 짊어진 삶의 무게만 버거워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의지하고 기대고 투정할 뿐 어머니의 다리를 시원하게 주물러 드리지 못한다.
응석받이 나를 키울 때 어머니의 치마는 검정색 광목치마였다. 광목치마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튼튼한 성벽(城壁)이었다. 그 치마는 펑퍼짐하고 넓어서 나는 치마 주위를 통치하는 어린 폭군이었다. 낯설고 부끄러울 때 들어가 숨기도 하고 거기에 얼굴을 묻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 치마는 내 눈물, 콧물 다 닦아주는 손수건이었다. 어린 내가 어머니 무릎에서 잠들면 나를 덮어주는 포대기이기도 했다.
탯줄이 끊기고는 젖줄을 놓지 않았고 젖꼭지에 빨간약을 바른 후부터는 치맛자락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다. 치맛자락을 놓치면 길을 잃을까 불안했고, 홀로될까 무서웠고,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나의 편을 잃을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은 나의 탯줄이요, 젖줄이요, 세상으로 날기 위해 중심을 잡아주는 연줄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치마가 어느 날 확 짧아지고 좁아졌다. 어머니가 처음 미니스커트를 입은 날이 어느 해, 어디로 나들이 할 때였는지 기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도 아주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의 상아빛 치마가 무릎에서 10cm쯤 올라갔다는 것이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어머니의 다리가 가늘고 팽팽하게 윤기가 흐르고 싱그러웠다. 짧은 스커트의 경쾌하고 산뜻한 느낌은 보기에도 자신감이 넘치는 젊음과 여성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을 나는 여자로 완성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오이디프스의 콤플렉스처럼 가슴이 일렁거렸었다.
1960년대 상대적으로 억눌렸던 여성들에게 다리를 많이 드러내는 대담한 미니스커트는 너무도 짜릿한 자기표현이었을 것이다. 1965년쯤에는 그 길이가 허벅지 중간까지 왔지만 여자들은 점점 더 대담해져서 치마의 길이는 점점 더 짧아졌고 초미니 원피스가 던져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나라에는 68년도에 인기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미니스커트를 입고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온나라를 술렁이게 한 사건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자들끼리도 '업소'에 나가는 여자라고 수군거리면서 하나 둘씩 그 짜릿한 여자의 완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경찰이 대나무 자를 들고 다니면서 무릎에서 20cm 이상 올라가면 풍기문란(風紀紊亂) 경범죄로 처벌을 했다. 아마 어머니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은 부러워하면서도 수군거리는 모순을 조금 더 즐기고 난 뒤였을 거다. 그전에 어머니의 외출복은 한복이었으나 월남치마도 입으셨고 무릎 아래 중간쯤에서 멈추는 주름치마라는 것도 입으셨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머니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할 때, 그때가 그리워진다. 지금의 어머니의 다리는 더 이상 푸르슴하고 팽팽하고 윤기가 나지 않아도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더 팽팽하고 푸르슴하다. 기둥이 집을 떠받치듯 어머니의 다리가 우리 세 남매 떠받친 커다란 기둥이었다. 그 짧은 치마 밑에 드러났던 가느다란 두 다리가 나의 삶을 지금껏 떠 받쳐주는 억센 기둥이다.
시간이라는 게 한꺼번에 지나가는 것이 아닌데 허망한 시간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연히 그러려니 내가 방기(放棄)하다시피 한 어머니의 슬픈 다리. 어머니의 다리는 해방과 전쟁을 넘어 간난의 질곡(桎梏)을 버텨온 큰 기둥 같은 다리이다. 미니스커트의 어머니 모습에는 회초리를 든 강한 어머니도 있었고 살려고 애쓰는 치열함도, 돌아서 눈물 흘리는 여인도 있었다. 어머니의 다리는 나에게 잠시 아름다움이었다가 슬픔이고 어쩔 수 없는 좌절이다. 지금 더 이상 팽팽하고 윤기 나는 다리는 아니지만 그 두 다리가 지금껏 나를 떠받쳐준 억센 기둥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팽팽하고 윤기가 흐르며 싱그럽다. 세상에 태어나 하늘 아래 살고 땅 위에 살 듯이 어머니 몸의 뿌리 하나 떼어 태어나 나이 육십이 다 되도록 치맛자락을 놓지 않고 같이 살고 있으니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탯줄에 매어 살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치는 날이 올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지금은 어머니가 외로울까 봐,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올까 봐 속으로 눈물 짓는다.
오늘 나는 햇살이 젊은 날 어머니의 다리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팽팽하고 싱그러운 이 아침에 어머니의 고단한 다리를 오늘 처음 발견한 것처럼 바라본다. 어머니의 다리는 나에게 잠시 아름다움이었다가 슬픔이고 어쩔 수 없는 좌절이다. 젊은 날 초야에 옷고름을 풀고 사랑을 나눈 남자와 똑 닮은 나는 지금 아무도 부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볼에 입맞춤을 하며 어머니가 여자란 사실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다.
“보배씨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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