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후에 산동네를 오르는 동네아저씨들은 길목에 있던 우리집 구멍가게를 그냥 지나 칠 수가 없었다. 한 동네 모두가 이웃이었고 주말이면 벌건 연탄불에 굽는 돼지고기의 냄새가 골목을 진동했기 때문이다. 고단한 하루를 버텨낸 그들은 뜨거운 고기 한점을 들고 소주 한잔에 연신 캬햐 소리를 외쳐댔다. 쓴 듯 단 듯한 차가운 소주에 매콤하고 걸출하게 버무려진 돼지갈비 한점이 허기에 지친 그들에게 고마운 감성의 맛으로 전해졌으리라.
산해진미의 진가도 맛을 아는 데서 비롯된다. 미각이 만족되지 못하면 완벽한 행복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의 오감 중 미각은 인간의 삶을 가장 즐겁게 한다. 액체에 녹은 상태의 화학 물질의 맛을 느끼는 감각이 미각이다. 대체로 사람은 최대 200가지의 복합적인 맛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한 맛은 단맛ㆍ짠맛ㆍ신맛ㆍ쓴맛의 4가지로 알려져 있다. 매운맛이나 떫은맛은 4가지 맛 이외에 촉감이나 통감이 섞인 감각으로 혀가 순수하게 느끼는 맛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마를 넣고 끓인 국물은 무슨 맛일까? 감칠맛이다. 이 맛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한 맛이다.
음식의 감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감칠맛(umami)이라는 제 5의 맛이 비로소 우리를 길고 깊은 맛의 여운으로 이끈다. 감칠맛은 20가지 아미노산 중의 하나인 글루탐산에 의해 감지된다. 감칠맛은 발효와 숙성을 통한 단백질 분해가 전해주는 궁극적인 미각의 완성된 맛이다.
그렇다면 어떤 와인이 감칠 맛 나는 와인일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와인은 Richness, Full-Bodied 한 와인이다. 주로 레드 와인에서 느껴지지만 오크 통에서 오랫동안 숙성된 화이트 와인에서도 느낄 수 있다.
미각을 느끼는 차이는 개인과 인종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만큼 심하다. 이유는 유전자의 결핍 때문이다. 유전자 결핍의 차이는 미뢰(미세포가 모인 혓속의 봉우리) 숫자의 차이를 낳는다. 맛을 감지하는 부분인 미뢰의 숫자, 즉 밀도의 차이에 따라 사람마다 맛을 느끼는 능력이 다른 것이다. 맛을 느끼는 1만 개의 미세포는 45세를 전후해서 감소하고 퇴화하면서 미각이 둔해진다.
남녀의 미뢰 분포수도 다르다. 여성은 남성보다 미각에 훨씬 민감하다. 특이한 점은 여성이 쓴맛에 민감한 반면 남성은 단맛에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여성이 쓴맛에 민감한 이유는, 보통의 독성 성분이 쓴맛을 가지므로 임신 중에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발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각은 인간자신을 보호하려는 놀라운 인체 과학 시스템이다.
그러나 맛이란 혀에 있는 미세포를 통해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 입 속의 점막에 닿는 느낌, 혹은 목에서 코로 퍼지는 향기, 눈에 보이는 음식의 색깔 등 실로 무수한 감각이 종합되어 생겨나는 것이다.
미각과 함께 시각과 후각, 기분이나 감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각기관이 동원 되어 느끼는 맛이 바로 ‘풍미’(風味ㆍflavor)다. 풍미는 한 마디로 감성과 이성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맛은 ‘맛(taste)’과 ‘향(flavor)’만이 합해진 것이 아니고 음식을 섭취할 때 느끼는 감각의 총합이다. 즉 미각, 후각, 촉각, 온도감각, 통각 그리고 감정, 분위기, 쾌감과 문화까지 합해진 감각이라는 것이다.
풍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냄새다. 냄새 분자의 집합체인 풍미를 느끼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종종 풍미료를 쓴다. 풍미료는 비록 자체는 아무런 맛이 없으나 음식이 가진 원래의 맛을 강하게 해주는 화학조미료로 그 종류와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니 매콤달콤하게 무쳐주는 시장통 욕할머니의 손맛에 주로 남자들이 매료되는 이유는 생명의 근본이자 맛의 근본인 미네랄 가득한 소금의 짠맛과 단백질 분해에서 일어나는 숙성된 단맛, MSG의 감칠 맛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추억하겠지만 천하유명요리사의 레시피도 어머니의 집밥을 넘어설 수는 없다. 투박하지만 살아서 숨쉬는 밥상, 엄마 손 맛 그대로, 태양초 고추장으로 주물거린 주물럭 한점이 그립다. 틀림없이 음식은 추억이다.
피터 황 Fine Wine Specialist www.winelab.co.n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