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2007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단어는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나 죽기전에 가 보고싶은 곳 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되고는 합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을 꼼꼼히 적은 메모지들이 가득 들어있는 버킷’정도로 쉽게 이해되는 말이지만 사실 이 버킷리스트라는 단어는 중세시대의 사형집행 방법에서 유래 했습니다. 사형수들을 엎어놓은 버킷에 올라서게 한 후 목에 올가미를 걸고는 버킷을 걷어차서 사형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버킷이 걷어차일지 모르니 그 전에 이것만은 꼭 해보고 싶다.. 하는 다소 청승맞은 소원 리스트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 어원이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크고 작은, 그리고 많고 적은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살아가는데요.. 북미 국가들의 중산층 성인들이 남미를 여행하고자 할 때 손에 꼽는 버킷리스트가 있다 합니다. 그러니까 단 한 군데만 갈수 있다면 어디를 가겠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곳은 바로 페루에 위치한 마추픽추 입니다.
마추픽추는 해발 2500미터에 살짝 못 미치는 고지대에 위치한 잉카문명의 유적지 입니다. 당연히 만년설 쌓인 산들이 콧잔등 높이에 나란히 펼쳐지고 한 여름에도 두툼한 옷을 챙겨입어야 하는 차고 건조한 지역이지요. 누가 이 높은 곳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돌을 날라와서 방대한 규모의 고대 도시를 건축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지만 다른 문명권의 유적지에 비해 너무도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는 건물들과 조형물들은 최소한 이 곳이 전쟁에 의해 멸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기사 누가 그 높은 곳까지 군대를 끌고 올라가서 시비를 걸겠습니까마는..
마추픽추에 들르는 관광객들은 세가지 유적에 강한 흥미를 느낀다고 합니다. 첫째는 손바닥만한 땅조각에도 곡물을 심기 위해 3미터나 되는 축대를 쌓아 놓은 집요한 계단식 밭이고, 둘째는 도시 곳곳에 물이 흐르도록 고안된 수로이며 셋째는 지금도 여전히 정확하게 제 할 일을 하고있는 해시계 입니다.
그런데 일반 관광객이 아닌 건축관계 종사자들이나 공학계열 종사자들은 오히려 엉뚱한 곳을 서성거리며 감탄을 한다 하는군요. 그 분들이 벌어진 입을 제자리로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성벽’때문입니다.
어디에서 옮겨온 것인지 그 원산지를 알 수 없는 검은 화강암 계열의 바위를 쌓아 축조한 성벽은 말 그대로 한 덩어리.. 쌓아 올린 바위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 강력한 접착제로 붙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위와 바위 사이에 종이 한 장 끼어 들어갈 틈도 없이 완벽하게 짜 맞추어졌기 때문에 공구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 자체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라 합니다. 마치 잘 짜여진 테트리스 블록들을 크게 부풀린 것처럼 개당 3톤에 가까운 바위들은 제각각 다른 각도의 직선으로 잘려져 서로 아귀를 맞추고 있습니다.
개성도 변화도 없이 사방 90도로 엄격히 잘려진 벽돌과는 달리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들은 다양함 속의 일치를 이루며 정밀하게 접합되어 있고 그들 사이의 연결면은 얼마나 치밀한지 바람도 통하지 않고 물도 스며들지 않는다 합니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을 서 있는 동안에도 크게 풍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하니 조만간 한번 들러서 사실을 확인해봐야 할 듯 합니다. ^^ 역시 뭉치면 산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먼 나라 페루에서도 오차없이 적용되는가 보다 싶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모여져 유기물과 같이 단단히 결속하는 사례는 남미의 마추픽추 외에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만리장성입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은 그 지도상 길이가 2700Km에 이르는데 주로 산의 능선을 따라 건축되었기 때문에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굴곡까지 고려한다면 6000Km에 이를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만리장성의 사진은 북경근처의 돌로지어진 번듯한 모양의 성곽인데요.. 이 장성이 산등성이를 타고 꿀렁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끝없이 전진하다보면 고비사막 근처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성을 쌓아올리는 재료 또한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과 얄풋하게 떠낸 검은색 이암에서 붉은빛이 도는 벽돌로 바뀌게 되지요.
사방이 붉은 황야지대에서 성을 쌓자고 있지도 않은 돌을 캐낼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무데서나 흙을 퍼다가 잘 이겨서 벽돌을 구워 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돌 보다는 강도가 많이 떨어졌겠죠. 제가 어릴적 아주아주 후미진 시골 친적집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그 흙벽돌 건물을 기억해보면, 벽돌로 만든 성곽이 든든한 방어막으로 우뚝서서 외적을 막아냈다고 상상하는 것은 좀 무리수가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돌로 지어진 부분보다 손상이 심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예상 외로 이 성벽은 강인했습니다. 대충 구운 흙벽돌을 쌓아만든 장성이 2000 년 이상의 세월을 버티고 견뎌 아직도 건재하며 시시 때때로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폭풍을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맞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흙벽돌 만리장성은 건축재료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하나의 미스터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2005년 인근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이 장성의 일부가 무너졌는데요.. 보수를 위해 일하던 인부 중의 한 명이 벽돌과 벽돌사이에 남아있는 이물질을 발견하고는 상부에 보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실험을 거친 후 그 이물질은 밥풀로 밝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푸석하고 버슬거릴것만 같은 벽돌들을 그 당시의 인부들은 주로 먹던 찹쌀과 조로 만든 죽을 사이사이에 발라가며 차곡차곡 쌓아갔던 것입니다. 당시 이 발견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기술자들이 쌀의 분자구조를 분석해가며 그 유용성을 따져 봤는데 실제로 요즘 벽돌을 쌓을때 사용하는 몰타르와 분자구조가 비슷해서 거의 같은 접착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는군요. 참으로 놀라운 고대인들의 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고산준령에 위치한 돌덩어리인 마추픽추나 황야 한복판에서 모래바람을 견디는 만리장성이나 각각의 조각들이 결합하고 연결되어 이루어낸 고대 건축 유산의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훨씬 더 아름답고 섬세한 다른 고대 건축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결속력입니다. 마치 처음부터 한 덩어리였던것처럼 물 들어갈 틈새도 없이 붙어앉은 거석들의 집합이나 부스러지기 쉬운 흙벽돌을 쌀풀로 붙여 연결해 한 덩어리로 축조한 성벽이나 서로간의 결속이 없다면 절대로 그 종합적인 가치를 이루낼 수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 가치는 하나 하나의 단편적인 조각들이 가지는 가치의 총합보다도 커서 마추픽추는 낱개의 돌이 이룰 수 없는 구조를 이루고 만리장성은 따로 떨어진 벽돌들이 할 수 없는 기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합과 결속은 구성원의 능력이 구체화되는 과정이고 서로간의 연결 자체가 쓸모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이제 캠브리지 시험과 IB시험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고 NCEA 시험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지막 시험준비에 정신이 없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덩치는 벌써 산만하게 커졌지만 아직도 아이는 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빈번한 것이 바로 관계와 결합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이 무조건 문제만 풀어대는 학생들을 대할 때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학습과정의 지식들은 모두 작은 소제목 단위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듈화된 지식의 구조를 쌓아 더 효율적인 학습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함인데요. 우선 하나하나의 모듈에 대한 학습을 하고 전체를 꿰어 흐름을 파악하던지 아니면 반대로 한 과목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나서 더 세세한 내용을 공부하던지 차이는 단지 학습 순서일뿐 궁극적인 지향점은 같습니다. 튼실하고 단단한 단편적인 지식들이 공교하게 짜 맞추어져서 이루어내는 한 덩어리의 구조물..
개념의 마추픽추요 지식의 만리장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문제는 모듈간의 결합부분에 집중됩니다. 쌓아올린 돌덩어리들이 마추픽추일 수 있는 이유가 틈이 없는 접합면 때문이듯 각각의 지식 모듈들이 얼마나 공교하게 연합하고 있는지를 시험문제는 테스트하고, 부실해 보이는 흙벽돌의 집합이 만리장성일 수 있는 이유가 찹쌀풀의 결합력이듯 각각의 지식을 연결하여 하나되게 하는 근본적인 논리의 결합력을 시험문제는 테스트합니다.
오늘도 마지막 시험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학생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풀어본 문제들을 책상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서 마추픽추를 만들지 말고, 시도 때도 없이 마셔대는 에너지드링크 캔을 쌓고 쌓아서 만리장성을 만들지 말고, 풀어본 문제는 다시 말로 풀어 설명해보며 자신의 이해를 공교히 하고 잠을 줄여 확보한 시간에 분산된 지식을 정리하여 결합시켰으면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식이 이루어낸 거대한 건축물이 갖가지 형태의 문제와 도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든든한 방어막이요 공교한 조형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김 준 원장 JMK 과학전문학원 021-314-432 jmkeduconsul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