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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피의자가 된 사연

 

 

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자정에 출발했다. 거리가 짧아 off duty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5분 이내 주행이나 2마일 이내 주행의 경우 driving으로 집계되지 않는다) 이 점은 중요하다. 왜냐면 일단 on duty나 driving이 시작되면 14시간 시계는 계속 흘러가기 때문이다. 14시간 시계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10시간 휴식 밖에는 없다. 자정에 일을 시작하면 다음날 오후 2시에는 무조건 일을 마쳐야 한다. 1차 배달시간은 오전 1시고 2차 배달시간은 오전 8시니까 괜찮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가급적 많은 시간을 확보해 두는 것이 좋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배달처는 예상보다 쉽게 찾았다. 게이트에서 체크인 하고 들어가 대기 장소에서 사선(斜線) 후진 주차를 무난히 잘 해냈다. 배정 받은 닥에서도 무리 없이 닥킹에 성공했다. 밤인데다 좁은 공간인데도 잘 해낸 것을 보면 내 실력도 꽤 늘었다. 2차 배달지까지는 30마일이니까 30~40분 거리다. 여기서 배달을 마치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다. 바깥 도로에 주차 공간이 있었으니 거기서 6시까지 쉬었다 가는 방법이 유력했다. TA 트럭스탑에도 자리가 있을 수 있지만 밤에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다. 2차 배달지 주변에는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모두 기우(杞憂)였다. 1차 배달을 마치고 서류를 받아 나온 시각은 7시가 넘었다. 2차 배달 약속 시간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덕분에 6시에 on-duty를 시작한 것으로 기록했다. 오후 8시까지 업무가 가능하니 시간은 충분하다.

 

2차 배달지에는 7시 58분에 도착했다. 2시간 조금 더 걸려 서류를 받았다. 럼퍼피 영수증은 필수로 챙겼다. 짧은 화물을 하나 더 받을 것인가, 그냥 집으로 갈 것인가? 원래 홈타임은 내일부터다. 글렌에게서 연락이 왔다. 트레일러를 저지시티 트로피카나에 내려놓고 밥테일로 집에 가라고 했다. 저지시티 까지는 100마일 가량 된다. 이 거리도 일한 것으로 친다. 저지시티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안 그래도 들를 참이었다. 지지난 금요일 시스코에서 럼퍼피 영수증을 받지 않아 환급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이메일을 보냈지만 무소식이다. 글렌은 약간 뺀질거리게 생긴 외모와 달리 은근히 사려가 깊다.

 

빈 트레일러를 내려 놓으려면 트레일러 내부 청소를 하고 연료도 가득 채우는 것이 원칙이다. 검사를 안 하는 곳도 있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다음 화물 운반자를 위한 기본 예의다. 가까운 트럭스탑으로 갔다. 예전에 이곳에서 심야에 리파워를 해서 메인주로 가는 화물을 받은 적이 있다. 오늘 낮에 와 보니 그때와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트럭 세차장은 트럭스탑 밖에 있었다. 앞의 트레일러는 먼지가 많아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내 트레일러는 금방 끝났다. 빗자루로 쓸어내기에는 약간 귀찮을 정도로 더러웠다. 시간이 없거나 세차장이 문을 닫았으면 내가 직접 청소를 했을 것이다.

 

일단 트로피카나로 갔다. 이 곳은 서너 번째 오는데 GPS와 실제 거리 표지판이 달라 헤매게 만든다. 오늘은 어떻게 다시 길을 찾는 지 확실히 파악했다. 트로피카나에 트레일러를 내려 놓고 시스코로 갔다. 시스코는 리버티 아일랜드 파크 근처에 있어 가는 길에 자유의 여신상이 잘 보인다. 접수 사무실로 가 날짜를 얘기하니 복사본을 출력해 주었다. $144 달러 벌었다.

 

커니에 위치한 트럭스탑에 들러 연료도 98갤런을 채웠다. 북부 뉴저지는 길이 좁고 혼잡해 꺼리는 곳인데 오늘 아주 뽕을 뽑는다.

 

조다리는 오늘도 막힌다. 퇴근 시간이니 더 하다. 밥테일이라 평소 일반 승용차 세우던 곳에 히마찰을 주차했다. 사람들이 보면 놀라겠다. 거대한 트럭이 서 있으니. 집에 도착하니 거의 6시다. 집에 있는 동안 처리할 일이 많다.

 

 

절도 피의자에서 무혐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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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약식 재판(Hearing)이 있었다. 이번에 집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다. 변호사 없이 스스로 변론했고 기소는 각하(dismiss)됐다.

 

알람은 6시로 맞췄지만 5시 조금 넘어 잠이 깼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다. 샤워하고 집을 나섰다. 17번 버스와 7번 지하철 익스프레스, 로컬을 번갈아 타며 롱아일랜드 시티에 위치한 TLC 사무실로 갔다. TLC에 볼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같은 층에 있는 OATH(Office of Administrative Trials and Hearings)에 재판이 잡혀 있다. OATH는 우리말로는 행정재판사무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택시 운전을 그만두기 얼마 전인 지날 2월 중순에 있었던 한 운행에 대해 TLC에서 나를 절도혐의(竊盜嫌疑)로 기소했다. 기소장을 우편으로 받고 날짜와 시간을 달력에 표시해 뒀다. 기소장은 집에서 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리니 오전 8시다. 이곳은 내게 친숙한 곳이다. 5년 전 택시 면허를 따기 위해 택시 학교를 다녔던 라과디아 커뮤니티 칼리지가 지척이다. 당시 TLC 사무실로 쓰던 건물은 지금은 라과디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TLC는 인근의 새로운 건물로 옮겼다. 1시간 30분이 남았다. 근처 식당에서 아침과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까 생각하다 곧바로 OATH 사무실로 갔다. 약속 시간 전이어도 미리 체크인을 하면 빨리 끝난다고 했다. 내가 두 번째 접수자였다. 나보다 4분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10분 후 세 번째 접수자가 왔다.

 

평범한 택시 운전사였던 내가 졸지에 절도 피의자가 된 사연은 이렇다. 2월 16일 오전 뉴욕 포트 오서리티 버스터미널에서 뉴저지 주 프린스턴까지 손님을 태워준 적이 있다. 그때 승객의 행동이 이상하고 불안해 보여 선불(先拂)을 요구했다. 뉴욕에서 뉴저지로 가는 경우 정해진 요금은 없으며 승객과 합의 후 운행하도록 돼있다. 나는 택시 가이드북에 나온 표준 요금표에 의거해 246달러를 제시했고 그는 군소리 없이 카드로 그 금액을 결제했다. 나는 요금을 받았으므로 택시미터기를 끄고 뉴저지까지 다녀왔다. TLC에서는 택시 운행 기록에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이 같으며 운행거리는 0인데 택시요금을 246달러나 받았으니 도둑질을 했다며 나를 기소했다.

 

약식 재판이 시작됐다. 판사는 내게 헬프코너에 가봤느냐고 물었다. 안 가봤으며 그곳에서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판사는 내가 받는 혐의가 무거우며 유죄로 판결날 경우 고액의 벌금과 면허 정지 등 엄한 처벌을 받는다고 경고했다. 헬프코너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상담을 해준다고 했다. 나는 굳이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판사가 내게 헬프코너에 먼저 다녀올 것을 권하는 눈치라 가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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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헬프코너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대신 다른 날짜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오늘 재판을 받겠다고 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판사 역시 다른 날짜로 연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오늘 재판을 원한다고 답했다. 변호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 스스로 변론하겠다고 답했다. 대신 한국어 통역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고 말했다. 판사는 전화를 걸어 한국어 통역을 연결했다. 영어로 말해도 되지만 생소한 재판 용어를 혹시 못 알아 들을까 싶어 통역을 요청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어차피 검사나 판사가 하는 얘기는 다 알아 듣는다. 통역이 한국어로 번역하는 동안 나는 답변을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오늘 한국어 통역사의 영어 실력은 내가 말하는 것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실력 있는 통역사의 경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뉘앙스까지 살려서 정확하게 전달한다)

 

검사의 소장 제기에 이어 증거물이 채택됐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물에는 몇 분 후에 내가 뉴저지에 있었다는 GPS 기록도 있었다. 이 기록은 나중에 내게 더 유리한 증거가 됐다

 

내 변론 시간이다. 나는 무죄를 주장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술 취한 백인 남성들에게 여러 번 택시비를 떼였으며 심지어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선불을 요구했으며 승객도 응했다고 말했다. 이때 이미 판사는 사정을 다 이해한 눈치였다. 판사도 백인은 아니었으며 검사는 흑인 여성, 나는 아시안 남성이다. 오만방자한 백인의 횡포(橫暴)에 분노하는 공감대가 형성됐을 법하다. 나는 증거물로 택시 운행 기록과 EZ Pass 기록을 보여주었다. 어제 자료를 준비하다가 발견한 96마일의 빈차 운행 기록도 보여주었다. 뉴저지에서 돌아온 후 맨해튼에서 짧은 운행 한 건을 하고 그날 업무를 마쳤다. 그 마지막 운행 전 빈차 운행 기록이 96마일인 것이다. 이 것은 내가 프린스턴에 다녀왔다는 결정적 증거다. 검사는 반대 심문을 해왔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며 일일이 반론했다.

 

최종 구형 시간에 검사는 규정 위반을 들어 나의 유죄를 요구했다. 최종 변론 시간, 나는 한 번도 승객에게 사기를 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집의 가훈이 정직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게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 그 가르침을 따랐다고 말했다. 판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판결을 기다리든지 집에 가서 우편으로 판결문을 받으라고 말했다. 나는 대기실로 나왔다. 그 사이 대기실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약 반 시간의 기다림 후 판결문을 받았다. dismiss였다. 내가 내야할 벌금은 0이다.

 

나름 좋은 경험이 됐다. 미국 법정에 선 것은 두 번째다. 우드버리에 쇼핑 갔다가 밤에 길을 헤매다 경찰에 잡힌 적이 있다. 차선 변경 신호 미이행으로 티켓을 받았다. 그 후 재판에 가서 벌점 없는 주차위반 티켓으로 변경해주겠다는 플리바겐(Plea bargain)에 응해 벌금만 내고 왔다. 혹시라도 재판에 간다면 억울하다고 이말 저말 하고 싶은 말 다 하기 보다는 재판에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좋다. 변호사 없이 자기 변론을 한다면 영어를 웬만큼 하더라도 한국어 통역을 요청하는 편이 유리하다.

 

택시 사고 재판도 진행 중이며 마지막으로 받은 교통 티켓의 히어링은 내년이다. 이런 것이야 시간이 가면 해결되고 기껏해야 벌금을 내고 벌점을 받으면 그만이다. 오늘 재판은 절도죄에 해당하는 것이라 사안이 심각했다. 증거물을 제시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나의 해명은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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