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오늘날 교회는 본래의 교회의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교회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고, 특히 오늘날 그런 교회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목사를 없애야 한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해보다 도저히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절이 싫어 절을 떠난 중과 같이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은 더 많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 교회의 잘못된 모습에 반응하는 이런 모습들은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념 없이 맹종하는 분들과 비교해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인식하게 될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상처 입은 짐승이 사나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처 입은 분들이 과격한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 역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되고, 꼭 해야 하는 말도 조금 더 과격해지기 마련입니다.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단어가 Peacemaker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Peacemaker이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Peacemaker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너무 아프고, 상대방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Peacemaker라는 우리의 정체성에 맞게 말해야 하고, 특히 행동을 할 때에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Peacemaker라는 우리말이 없어서 여러 말로 번역을 하지만 저는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이 가장 마음에 다가옵니다.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은 늘 평화를 생각하고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한다는 의미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경우에서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손에 무기를 들고 생명을 위협할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무기를 들고 대항할 수 없습니다. 무기를 들고 상대방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경우, 그 사람은 현실을 타개할 수는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입니다. 마찬가지로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개혁이나 정의는 그것이 아무리 필요하고 바르다고 해도, 결코 하나님 나라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런 불가능을 향해 아무런 대책 없이 뛰어드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의 숙명입니다.(롬14:8)
그렇다면 왜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근본에 해당하는 Peacemaker로서의 역할을 까마득하게 망각한 것일까요?
비슷하지만 반대인 두 길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분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갔지만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려와야 했다네.
조희선 시인의 삭캐오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아주 간단한 사실의 진술을 통해 위대한 진리를 전합니다. 그분을 보려는 사람이 있고,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삭개오가 나무에 앉아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았어도 그는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과는 상관없는 앎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토색질 한 것 역시 아랑곳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오늘날이라면 오히려 많은 재산에 대해 간증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주님은 그를 불러 내려오라고 하셨고,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그 만남은 생명과 연결되는 거듭남이 되었습니다. 그의 안에서 생명이 싹트자 그는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토색질한 것(어떤 수석비서관과 검사장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을 네 배로 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후에도 그에게는 여전히 남은 재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행동이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생명의 열매임을 애써 호도하려 합니다. 아닙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저는 개혁을 말하는 분들이나, 목사교를 폐지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분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생명의 꽃으로 피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기서 그런 분들이 주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무 위에서 지나가시는 주님을 보고 자신도 주님을 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었는지가 그런 모든 일의 관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남의 결과
그리고 만일 그런 분들이 정말 주님을 만났다면 그분들의 행동은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면서도 Peacemaker라는, 평화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귀중한 삶의 모범을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알고 지적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폭력적이 되거나 미움에 사로잡혀 사랑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제거하거나 바로잡아야 할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사단의 진영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자신들만이 옳다는 자의식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가장 나쁜 악한 일이 될 것입니다.
얼마든지 생각하고, 얼마든지 말하고, 얼마든지 바른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일이 평화를 도모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길에서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해할 것입니다. 주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와 같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을 저주하기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자들이 원했던 것처럼, 그들을 제압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주장을 관철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오합지졸 같았던 제자들에게 당신의 나라와 그 나라의 사역을 위임하셨습니다. 하지만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그 일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보고 마음이 아픈 분들은 사랑과 희생의 섬김으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은 이 시대에 복음의 불을 놓아야 합니다. 그 길은 힘을 가지는 길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길도 아닙니다. 오히려 약해지는 길입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연약한 상태에서 더욱 약해지는 그 길을 걸을 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약함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보고, 오직 스스로의 약함만을 자랑하는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 실천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평화 도모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Peacemaker들입니다.
성령공동체
그러나 한 마디 꼭 덧붙여야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Peacemake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 백성으로 이루어진 성령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성령공동체는 복음의 모판이며 복음의 삶을 실제로 가능하게 해주는 울타리이며 보호막입니다. 근본적으로 복음은 개인이 아니라 성령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성도가 되어 홀로 된 분들은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복음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이 모여 성령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결코 개인적인 신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이 모여 성령에 이끌리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복음을 살아낼 때, 그런 분들의 모임인 성령공동체는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 어두운 세상의 실체를 드러내고 복음이 진정한 소망임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가 생각납니다. 그 시의 의 마지막 연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이 되어주는 성령공동체를 이룰 때, 그때에야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여명은 밝아올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개혁이나 '진짜 교회' 타령은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여러분들에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