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면모와 균형 외교, 파나마 침공-이라크 폭격 ‘반인권적’ 부정 평가도
(올랜도=코리아위클리) 위일선 본호사(본보 법률자문) = 며칠 전 사망한 미국의 41대 대통령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에 대해 세간에는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위대한 대통령이었다고 찬미하는 이들은 그가 행한 사악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반면, 조지 부시를 사악한 인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가 이룬 업적에 대해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 인물을 놓고 동시대를 산 사람들의 평가가 이토록 극과 극으로 상반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부시에 대한 미국 언론의 평가는 압도적으로 그가 풍부한 정치적 경륜을 가지고 폭 넓게 소통하는 지도자였으며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취임사에서 미국이 “친근하고 부드러운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던 그는 민주당이 추진하고 공화당이 극구 반대하던 ‘장애를 가진 미국인 특별법’ (ADA)에 대한 지지를 천명함으로써 양당의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 내어 법률로 통과시켰고, 그 후 ADA는 지금까지 수백만 장애인들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ADA는 장애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과 공격성을 바로잡는 한 편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어엿한 시민이라는 신념을 갖게 해 주는 순기능을 해 오고 있다. 역대 공화당 대통령들과 달리 부시는 환경 보호를 위한 행정 조치들을 취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구 소련이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외교력을 발휘한 것이 칭송받는다. 부시는 그 기회를 틈타 미국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거나 소련 및 동독 지역의 궤멸을 이끌어 내려 하지 않고, 서부 유럽 각국의 정상들에게 전화를 걸어 신중하게 자제할 것을 당부하는 한편으로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가 구 소련의 자리를 이어 받아 안보리 상임 이사국의 지위를 이어가도록 여타 상임 이사국을 막후에서 움직여 러시아의 유엔 내 입지를 알력 없이 확보해 준 것이 그 예라고 한다.
공작 정치의 대가 ‘조지 노리에가 부시’
하지만, 이와 전혀 상반된 평가도 존재한다. 1976년 부시가 CIA 국장에 임명되었을 때 중미 파나마의 실권자는 오마르 토리요스 장군이었다. 1968년에 토리요스가 군사 구테타로 집권한 후 미국 정부는 토리요스를 지원하는 한 편으로 그의 밑에서 정보 부장을 하고 있던 마누엘 노리에가에게1970년부터 CIA 자금으로 연봉 10만 달러씩을 주면서 그를 이용하고 있었다. 조지 부시는 CIA 국장 취임 후 노리에가를 미국으로 불러들여 토리요스 군사 정권의 독재에 대한 지원을 재다짐한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의식 있는 일부 미국인들이 조지 노리에가 부시라고 부른 것이 이 때부터다.
미국 동부 및 유럽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최단거리로 건너다닐 수 있는 지역에 위치한 파나마는 원래 콜롬비아의 일부였던 것을 1903년 미국이 지원해서 콜롬비아로 부터 독립시킨 국가이다. 독립을 지원한 댓가로 미국은 파나마에 운하를 뚫어 자국 상선들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최단 거리로 드나들 수 있게 하는 한 편으로 자국의 군대가 두 대양을 쉽게 오갈수 있는 길을 확보한다. 그런데, 미국이 파나마에 운하를 건설하고 연간 사용료 25만 달러라는 헐값에 소유 및 운영할 수 있도록 했던 양국간의 조약에는 미국이 2000년까지 운하의 소유권 및 운영권을 파나마에 양도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조약을 지키기 위해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9년 파나마의 지도자 오마르 토리요스와 1999년까지 단계적으로 이들 권리를 양도하는 구체적인 협약에 서명을 한다.
노리에가의 독재와 부시의 파나마 침공
1981년 1월, 카터의 뒤를 이어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취임한 지 불과 몇 달 후인 1981년 7월 오마르 토리요스는 의문의 비행기 폭발 사고로 사망한다. 그 후 파나마의 실권을 장악한 마누엘 노리에가를 조지 부시 당시 부통령은 백악관으로 초청하고, 곧 이어 노리에가는 파나마의 명실상부한 통치자로 집권한다. 이후 1989년에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를 미국으로 압송해서 재판에 회부하고 40년 형을 선고할 때까지 노리에가는 파나마에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마약 밀매와 부패로 얼룩진 잔혹한 반민주적 독재 권력을 휘두른다.
미국이 1989년 12월 중순에 파나마를 침공했을 때 미국의 언론들은 한결같이 노리에가가 마약을 미국으로 밀매했고, 극도로 부패했으며 자국민에게 잔인한 독재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파나마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침공이 불가피했다는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보도했다. 언론은 성공적인 야간 기습으로 미군이 파나마 시티에 무혈 입성을 했노라고 보도하고, 텔레비젼에는 미군의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만이 방송되었다.
그러나 파나마 시티 시내 곳곳에서 파나마군과 미군 사이에 교전이 있었고 수백명의 파나마 국방군과 최대 1000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수 많은 민간인들이 부상한 사실 등이 알려진 것은 수 개월이 지나 유럽과 남미의 일부 언론을 통해서였다. 파마나인들은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가옥이 파괴되어 졸지에 거리로 나 앉은 사람이 1만 명을 넘으며, 사망자는 1500명을 넘었다고 증언한다.
파나마 침공이 있기 전인 1988년에 노리에가는 군부 일부 세력의 구테타로 체포, 구금되었다가 구테타 세력의 도움 요청을 거부한 미국이 관망하는 사이 충성파의 진압 작전으로 살아남는다. 그 후 권력을 더욱 공호히 장악한 노리에가는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거리로 뛰쳐 나온 시민들을 군대를 풀어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지지를 끌어올릴 목적으로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 국민의 것이고 따라서 운하의 소유권과 운영권은 미국이 아니라 파마나 국민에게 속한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수 개월 후 조지 부시는 2600명의 정예 특수 부대를 파견해 야간에 파나마 수도 파나마 시티 내 주요 시설과 7개 외곽 시설을 공습하고, 당시 파나마에 주둔 중이던 1만2000 명의 병력을 전투에 동원한다. 조지 부시의 파나마 침공은 파나마운하의 영구적 장악을 위한 것이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과 1차 이라크 전쟁
파나마의 독재 지원과 침공 외에도, 부시는 CIA 국장 재직 시절과 부통령 재직 시절 이란 무기 밀매, 콘트라 반군 지원을 통한 니카라구아에서의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 기도 등 각종 스캔들과 전쟁 기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특히, 쿠웨이트에 침공했던 이라크 군이 유엔 결의를 따라1991년 2월 26일과 27일 양일 간 쿠웨이트로 부터 이라크로 공개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부시는 쿠웨이트와 바그다드를 잇는 도로 상의 군인들과 이라크 민간인들을 무차별 폭격해서 퇴각하는 군인들은 물론 그들과 섞여 있던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이것이 전쟁범죄로 국제적인 지탄을 받은 소위 ‘죽음의 도로’(Highways of Death) 사건이다. 따라서, 부시의 이런 행적에 더 관심을 두는 이들은 그가 절대로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친근하고 부드러운 정치지도자로 포장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집권 전반기에 국내적으로는 장애자 인권 보호 법률의 통과와 친환경 정책, 대외적으로는 구 소련의 붕괴와 동서독의 통일 및 성공적인 파나마 독재자 제거 등을 이유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인 89%의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두루 정치력 있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찬사를 받았던 부시는 1991년과 1992년에 미국 경제가 악화되자 1992년에는 30%로 지지율이 하락해 결국 “경제가 관건이야, 이멍청아”를 외친 풋내기 주지사 빌 클린턴에게 대선에서 패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다수 대중은 자기 주머니에 들어 오는 돈의 크고 작음이 최대의 관심사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