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폴 틸리히는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를 생각하면 쓰레기가 연상됩니다. 신대원 시절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쓰레기들이었습니다. 비단 자유주의 신학자 부류에 속한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레기들이었습니다. 해방신학자들도 쓰레기들이었고, 신비주의자들도 쓰레기들이었고, 다석이나 유동식 이현필 등등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신학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쓰레기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던 교수님은 박형룡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가 인정한 사람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쓰레기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쓰레기장으로 보내면서 짓던 그 득의양양하던 그 교수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조금 지나친 면은 있지만 신학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교수님의 짓던 그 득의양양한 표정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표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태도를 버리면 예수님은 오염되고 기독교는 망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학교를 다니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오늘날 그 교단이 똥통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자신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쓰레기장으로 보내는 동안 자신은 똥이 되고 그렇게 배운 사람들의 교단은 똥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똥통 교단에서는 똥냄새가 진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똥통에 빠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이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정말 똥다운 사고이며 태도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독야청청 하는 똥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역사는 이런 똥통들의 역사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가지는 공통된 특성이며 그런 특성을 가지게 된 종교는 더 이상 종교로서 기능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는 것이 역사가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틸리히는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 어느 한때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여 주어진 ‘과거’의 해석 자체를 붙들고 있겠다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태도나 유럽의 정통주의적 자세는 ‘과거의 정황’에서 형성된 특수 해석 자체를 절대화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악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파악한 무한한 하나님은 시공에 얽매인 제한적인 이해와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근본주의와 유럽의 정통주의를 과거의 해석 자체를 붙들고 있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저는 그러한 미국의 근본주의와 유럽의 정통주의를 한 시대의 인간들의 노력으로 깊이 존중합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에도 절대화 하려는 태도는 틸리히의 말대로 ‘악마적 특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마적 특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호시탐탐 그런 기회를 노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틸리히의 이러한 이해를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했던 똥통교단의 교수님처럼 과거의 해석을 수호하느라 악마가 되기 쉽습니다. 악마적 특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런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들의 표정은 사납거나 빈정거리는 모습이고 태도는 매우 폭력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특성이 되어버린 사나운 모습은 이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혹은 자신들의 목사가 가르쳐준 것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악마의 모습을 닮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폴 틸리히는 그것을 또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각 세대가 자신들의 세대를 위해 그때그때 새롭게 해석하는 이른바 ‘응답하는 신학’으로서의 신학적 소임을 방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해서 인간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말씀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대마다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진리를 받드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쉬이 깨달을 수 있는 일입니다. 흑인 신학은 흑인들이 노예였던 시절의 아픔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성신학이나 생태신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을 육화하는 순종의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저는 신대원에서 교수님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사람들에게서 진지한 하나님 사랑과 그들만의 깊은 깨달음이라는 보배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벗어나고 보니 제가 쓰레기 신학에 오염되었었다는 사실조차도 귀중한 은혜의 시간이었다는 깨달음이 밀려듭니다. 사납고 폭력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이해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유지하라는 성서의 메시지가 새삼스럽습니다.
사람들을 쓰레기로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지옥 짓기의 한 형태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 역시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일천한 자기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자신의 ‘악마적 특성’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