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훈의 ‘혼자서 지구한바퀴’ (4)
Newsroh=안정훈 칼럼니스트
각자의 살아온 스타일에 따라 여행의 방식도 다르다. 인생을 계획성 있게 살아온 사람은 여행도 계획성 있게 한다. 내 인생 1막을 돌아보면 계획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목표를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하며 살기 보다는 그냥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 했다. 살아온 인생이나 홀로 떠나는 여행이나 계획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여행 시작도 즉흥적이고 감성적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되고야 말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미래나 희망은 남의 얘기로만 여겼다. 근거도 없는 자만심과 근거가 확실한 열등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외향적이거나 사교적이지도 않았다. 내성적이었고 학창시절에는 데카당에다 니힐리즘에 빠지기도 했었다.
중학교 때는 영화광이었다. 일주일에 영화를 평균 다섯 편정도 보러 다녔다. 종로의 단성사, 피카디리, 낙원, 아시아, 국제 극장에서부터 을지로의 국도, 스카라, 명보, 경남극장 그리고 퇴계로의 대한, 명동, 아데네 극장까지 다니다가 볼 게 없으면 변두리에 있던 대지, 불광극장 등 재개봉관까지 찾아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한국 문학 전집, 세계 문학 전집, 철학 전집에 빠졌다. 신문을 만드는 학보사에 들어가 “세계의 철학자들”이라는 시리즈를 연재하기도 했다. 대학교 때는 대학 신문사에 들어가 글쟁이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활화산처럼 감수성이 분출하던 청년기는 암울한 유신의 시대였다. 위수령과 휴교령이 내려져 학교 문은 닫히고 수업은 제대로 받아 보지도 못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군인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웃픈 시절이었다.
꿈도 청춘도 일시 정지 버튼이 눌러진 것 같았다. 그래도 학생회관 지하에 있던 대학 신문사에는 빠지지 않고 출근해서 빨리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노을이 물드는 술시가 되면 홍탁집, 학사주점, 목로주점, 빈대떡 집으로 몰려가 막걸리를 토할 때까지 마셨다. 그 때 술 마시면서 젓가락 장단으로 드럼통 테이블을 부서져라 두드려가며 목이 메게 부르던 신문사 사가를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우리네들 부모님은 나를 곱게 길러서 신문사 가서 요 모양하라고 나를 곱게 길렀나…”
“믿을래서 믿었나? 외로워서 믿었지…” 참 자조적인 가사다.
작취미성(昨醉未醒)이 되었을 때 나는 시를 쓰곤 했다. 다행히 내 시의 애독자가 한 명 있었다. 47년 전 첫 미팅에서 만나, 42년 전 결혼해서 평생 우리 집 차례 제사 지내 주는 지금의 내 아내다. 그런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 장교로 지원해 소위로 임관한 후 30년 동안 유니폼을 입고 살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사람의 운명이라더니 나를 두고 한 말 같이 느껴진다.
서정주 시인은 자기 인생의 8할은 바람이었다고 말했다. 나의 경우는 내 인생의 8할은 꿈이었다. 꿈꾸지 않았으면 난 진작 스르르 무너졌거나 포기했을 것 같다. 지금은 돌쇠처럼 살지만 은퇴하면 알바트로스처럼 살겠다는 몽상이었다. 죽기 전에 지구 유랑 한번 해보자,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장기와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꿈과 희망이었다.
꿈은 꿈일 뿐일까? 아니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걸까? 확신이 없었다. 인생 2막에서도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사업도 해보고 해외에서 봉사 활동도 해보고 연구소에서 근무하기도 하며 반퇴자로 살았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하게 내 꿈을 이루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꼭 움켜잡았다. 지금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꿈은 구명줄이다. 힘들다고 놓아버리면 만사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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