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이렇게 속물스런 치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여기 영화관에서 55세 이상 어르신은 단돈 2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네요”
문자 첫마디에 찍혀왔다. 아니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덕담도 아니고 이건 뭔소리여...
“그렇구나 하다가 깜짝 놀랬지뭐유. 내가 해당된다는 사실이 웃기기도 하고 하도 어이 없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너스레를 떠는 딸 애.
“떡국이나 먹지 나이는 왜 먹어가지고 야단이야...”
자식의 나이타령 인생타령을 들으며 헛헛한 웃음이 절로났다. 웃을 일이 아니었지만 웃을 수 밖에...
돌아보니 해놓은 일도 없는데 어느새 나이만 먹었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 나이때 내가 했었던 말이었다. 가슴이 짜안했다. 그 동안 나만 나이먹어 늙어가는 줄 알고 있었다. 딸애의 그런 응석이라도 있으니 다행스럽다. 아직은 어린 자식인줄 착각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모녀의 첫 날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누구는 뭘 해놓고 나이를 먹었나 어찌어찌 살다보니 세월이 갔고 나이를 먹게 되는 것을...
“그럼 어르신 딸까지 둔 이 엄마는 어쩔까? 고려장도 한참 지났으니 어떻게 하지...”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오래 산다는 구차스런 변명이었을까? 슬며시 나도 투정을 해 본 것이다.
“요즘 엄마가 너무 이쁘고 고맙다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다시 한자씩 글자를 확인했다.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네) 여지껏 살면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낯설고 생소한 말이어서 낯이 간지러웠다. 그런데도 기분은 가벼워졌다.
설날 아침이다.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최고의 덕담을 보내준 내 딸. 내 또래의 어른들이 거의 병중에 있다더라는 말을 주변에서 흔히 듣는다고 했다.
울엄마 지금도 립스틱 곱게 바르고 젊게 방방 뛰어다니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나...
울컥 뜨거운게 치밀었다. 벅찬 감동이었다. 늙음은 외로움이고 서러움. 혼자서 견뎌내는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하던가. 멀리 떨어져서 보니 새로운 시각으로 엄마를 보고 느낀 깨달음이었나보다.
그도 어른 대우를 받는 나이가 됐으니 철도 들은 것일까?
나른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게 바로 행복 그런 초하루였다. 언제부터인가 초연해지기 시작했다. 모든걸 내려놓고 가볍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온갖 탐욕에서 벗어나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지는것 같아 즐겁다.
자식들이 이 늙은 어미를 이쁘다고 칭찬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언제까지가 될 줄은 아무도 모른다. 그 때까지 더 열심히 살아가자고 다짐을 한다.
립스틱은 더 화사하게, 노래도 부르고 친구들 만나 수다도 떨어야겠지. 게으름에 주저앉지 말고 내게 주어진 일을 감사히 최선을 다 해야겠다. 얼마나 남았을지?... 하얗게 여백으로 남은 삶에 아름다운 채색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
문득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불편한 영혼. 어떤 사람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입술이 빠알갛다고 심하게 충격을 주었던 남편이었다. 나도 젊은 여자인데 어쩌라고?... 첫 애를 임신했을 때다. 혈색없는 얼굴이 거슬려 서랍 깊숙히 두었던 립스틱을 꺼내 조심스럽게 발라보았다. 화색이 돌아 보기좋았다. 지독히도 싫어하는 일에 도전했으니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특별한 경우니까 봐주겠지 하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귀가한 그 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평생을 메아리로 기억에 남아있다.
“당신 종삼여자야?...”
한치의 망서림도 없이 튀어나온, 내겐 독설이었다. (그 시대엔 종로 삼가가 윤락가였었다) 그 때의 모욕감. 챙피해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 미움이 내 맘속에 긴 세월 도사려 떠나려 하질 않았다. 내 젊음은 오롯이 화장끼없는 순수한 얼굴로 살았다. 가끔씩 화사한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었다.
그가 떠나고도 오랜동안 화장을 한다는게 쉽지 않았다. 습관이란 틀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인가보다. 아주 조금씩 뒤늦은 자기관리에 눈을 떴던 여자였었다.
집과 여자는 가꿀탓이라는 말이 있다. 가꾸면서 다시 태어나는 여자. 그가 지금 내곁에 있다면 립스틱이 내게 허용이 됐을까?
세상이 아무리 많이 변했어도 그 고집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엔 겁없이 입술이 빨갛다. 나이 먹어가면서 립스틱 색깔이 자꾸 짙어만간다.
나는 지금 너무 바쁘다.
오늘은 수요일. ‘무지개 교실’에 가기위해 서둘러야 한다. 아침마다 하는 가벼운 스트레칭 때문에 시간을 좀 뺏기지만 건강을 위한 일이니 건너뛸 수가 없다. 그럴듯한 화장대도 없어 손바닥 거울로 정성껏 화장을 한다. 늘상 하는 일이지만 설렘같은 부푼 마음은 오늘도 여전하다.
시간맞춰 나가면 에어컨도 시원한 공짜 버스가 태워다준다. 목적지까지 기사가 친절하다.
반가운 얼굴들. 허물없이 가족처럼 먼저와서 반겨주는 형님아우들. 일일히 손을 잡아주며 따뜻한 사랑을 교감한다.
수만리 객지에서 육친처럼 정을 나누고 사는 우리들. 같이 늙는다는 공감대가 혈연처럼 끈끈하다.
따끈한 커피 한잔에 지난 일주일간에 있었던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아이들과 살짝 다툰 이야기도 거침이 없다. 누구나가 다 알고 지내는 일이기에 마음을 비운다. 온종일 혼자서 말이 고팠던 사람에겐 최선의 자리가 아닌가. 노인들에게 보약의 효과로 행복을 심어주는 짧은 시간이지만 값진날이 틀림없다.
국맛이 따끈하고 칼칼해서 일품인. 모두가 함께 하는 점심시간. 진수성찬이 아니라도 꿀맛이다. 여럿이서 그릇 부딛히는 소리를 들으며 먹을 때가 밥맛이 최고인 것을...
발성부터 노래연습을 하려면 두둑히 먹어둬야 한다. 하나같이 거울을 꺼내들고 화장을 고치는 모습이 젊은이와 다르지 않다. 즐거움도 좋지만 연말에 있는 공연이 목적이니 책임감도 만만찮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활력소이기에 열심으로 연습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즐겁고 행복하다. 한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간다. 노래로 영근 얼굴 얼굴들이 가벼운 흥분으로 달궈진다.
7.80대 사람들이 늙을줄을 모른다. 율동을 시켜도 싫다는 엄살도 없다. 땀을 닦는 손수건에 보람이 함께 묻어난다.
립스틱 곱게 바르고 방방 뛰며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쁜 엄마들이다.
칼럼니스트 오 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