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훈의 혼자서 지구 한바퀴’ (9)
러시아는 페퍼민트색이었다
Newsroh=안정훈 칼럼니스트
함박눈이 쏟아지는 모스크바의 민스크 벨라루스카야 기차역 Drawing by 안수련
하얀 눈이 쏟아지고 선명한 페퍼민트 톤의 석조 건물역 앞에 가로등이 켜진 풍경은 동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서울에서 6613 km나 떨어진 머나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나는 화려한 5월의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도모데도보 공항 아에로익스프레스 역 입구 간판
아에로 익스프레스가 모스크바 시내로 간다는 뜻 같은데 낯설기만 했다.
플랫홈에 들어 온 아에로 익스프레스
이루크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저가 항공기를 타고 갔다.
요금이나 시간 등을 따져 보니 기차 보다 비행기의 가성비가 훨씬 좋았었다.
마침 검색 하다가 다음날 출발하는 싼 가격의 비행기 표를 발견하고 급하게 질러 버렸다.
우선 숙소만 예약 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교통편은 제대로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도착해서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찾아가 물어서 가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떠났었다.
모스크바에는 3개의 공항이 있다.
그 중 시내에서 42km 거리에 있는 도모데도보 공항에 내렸다.
이 날의 미션은 공항에서 예약한 숙소가 있는 민스크 벨라루스카야 역 까지 가는 것이다.
먼저 아에로 익스프레스라는 공항 철도를 타고 빠벨레프스키 역까지 가야 하는건 알고 있었다.
거기서 지하철로 바꿔 타고 민스크 벨라루스카야 역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별로 어려울 건 없다고 생각 했었다.
도모데도보 공항 아에로익스프레스 역 입구 간판
기차표를 사기 위해 창구로 가서 직원 아주머니에게 "플리즈 원 티켓 투 빠벨레프스키 스테이션"이라고 말했다.
전혀 못 알아 들었다 .
비행기 안에서 부터 혼자 중얼거리며 열심히 연습한 멘트였는데 먹통이라니? 앞이 깜깜해졌다.
종이에 적어 온 기차역 이름을 보여 줬지만 역시나 모르겠다는 표정과 몸짓을 할 뿐이었다.
내가 반복해서 말하자 창구 너머의 아주머니께서 화난 것 처럼 큰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내저었다.
내 머리 속의 바디 랭귀지 번역기를 급하게 돌려 보았다.
"귀찮게 하지 마라. 네가 말하는거 전혀 못 알아 먹겠다. 저리 꺼져라. 짜증나게 하지 마라" 는 의미로 해석 됐다.
경험상 오래 버텨 봐야 좋은 꼴 못 볼것 같아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영어로 된 안내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난감하면서도 참 화가 나기도 했다.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면서 마음을 가라 앉혔다.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을 해봤지만 뽀쪽한 대책이 없었다.
오히려 미운 마음에 엉뚱한 생각만 하고있었다.
"너희는 러시아가 아직도 강대국인 걸로 착각하고 정신 못 차리고 있구나."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뒤쳐지면 절대 잘 살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있구나. 쯔쯧쯔."
아에로 익스프레스가 모스크바 시내로 간다는 뜻 같은데 낯설기만 했다.
그러다 퍼뜩 제 정신을 차렸다.
러시아를 평가하고 가르치러 온것도 아닌데, 제 코가 석자나 빠진 주제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놈이 다리 위에서 웃는 놈 배꼽 보인다고 나무라는 격 이었다.
'철저히 알아보고 준비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영어 먹통이라고 러시아 사람들 탓하면 안되지' 하면서 실소(失笑)를 지었다.
꼰대는 항상 남을 가르치려 든다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꼰대로 살지 않겠다고 울타리 밖으로 나섰는데 제 버릇 개 못 주고 있는 내 꼬라지가 한심했다.
꼰대가 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버릇이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험난하겠지만 그것보다도 꼰대 탈출은 더 어렵고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있었지만 선뜻 기차역으로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흡연장에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젊은 여성이 다가와 담배 한대 얻을 수 있느냐? 고 물었다.
러시아를 여행하며 담배 거지를 많이 만났지만 젊은 여성이 영어로 담배를 달라고 하는건 처음이었다.
이건 뭐임? 영어 하는 사람? 도움을 받을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담배를 한 대 주면서 상황을 설명하자 자기도 공항 철도 탄다고 하면서 따라오면 된다고 했다.
자기는 식사를 못해서 요기(療飢)를 먼저 해야 한다고 해서 같이 스낵 바에서 감자 튀김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 사는 대학생이고 친척 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내가 감자튀김 값을 내겠다고 하자, 각각 내면 된다면서 사양했다.
19살의 러시아 여대생 아나스타샤의 뒤를 따라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기차역 창구로 가서 표를 구입했다.
아에로 익스프레스는 2002년도에 만들어졌고 시내로 가는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기차 안은 우리나라 KTX와 구조가 비슷했다.
플랫홈에 들어오는 아에로 익스프레스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하다보니 아나스타샤도 어려운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었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암울한 현실에 불만이 많았었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두려웠다고 말해 주었다.
어느 나라나 청춘들의 고민은 비슷했다.
해답을 줄 수는 없겠지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별로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냥 열심히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다 보니 어느 새 종착역에 도착했다.
빠벨레프스키 역에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야 지하철역이 있었다.
지하철 플랫홈은 에스컬레이터로 단번에 연결되는데 깊이가 100미터도 더 되어 보일 정도로 깊었다.
내가 놀라워 하자 아나스타샤는 모스크바의 지반(地盤)이 약해서 바위층이 있는 깊은 지하까지 판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냉전시대 핵 전쟁에 대비해서 깊이 판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설명이 달랐지만 그럴수도 있겠다고 끄덕여 주었다.
재미난 것은 모스크바 지하철은 오래 전에 만들어져서 안전문이 우리나라 처럼 투명한 문이 아니라 칙칙한 색깔의 철문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플랫홈과 지하철 차량이 완전히 차단되서 보이지 않았다.
안전문이 열렸다가 닫힐 때 마다 덜커덩 꽝하는 소리가 마치 감옥문 여닫는 소리 같았다.
아나스타샤와 나는 가야 할 방향이 반대였다.
그녀는 내가 가야하는 통로 입구까지 데려다 주고 떠나갔다.
선녀가 펑하고 나타났다가 돌아갈 시간이 됐다면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것 같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작별이 너무 아쉬웠다.
아나스타샤가 감자 튀김을 먹고나서 남은 음식으로 접시에 사람 얼굴 모양을 만들었다. 재치가 돋보였다.
든든한 동행이었는데 휘리릭 떠나가 버리고 나니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내부 벽에 크게 붙어 있는 안내 지도를 보면서 가는 길을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알아먹지도 못하는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 메이 아이 헬프 유 ? "라고 묻는다.
돌아보니 말끔한 차림의 40대 신사가 업무용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민스크 벨라루스카야 역 까지 간다고 하니 자기도 그 곳으로 간다면서 따라 오라고 했다.
그는 무역업을 하면서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현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아서 자기도 외국인을 보면 도와준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우리는 승객들이 많아서 별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그는 작별 인사를 하고 기차를 타러 가기 위해 총총 걸음으로 바로 옆에 있는 민스크 벨로루스카야 기차역을 향해 떠나갔다.
우연히 만난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야!' 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려고 온 사자(使者) 같았다.
오래 전 언론정보 대학원에서 공부 할 때 지루한 수업을 재미있게 해주려고 김 교수가 했던 우스개 이야기가 생각 났다.
"예수가 지금 세상에 다시 부활 한다면 제자들에게 어떤 첫 마디를 할까요?"
"제자들아. 기자들을 불러라, 카메라 기자 꼬옥 챙기거라. 마감 시간에 맞출 수 있게 서둘러야 한다."
"예수는 히브리어가 아닌 영어로 말 할 겁니다."
영어가 전혀 먹통인 러시아에서 신기하게도 어려울 때 마다 영어로 말하는 귀인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었다.
비록 유창하지 못한 영어였지만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외국에 나가서 돈 벌어야하는 입장이 아니라 돈 쓰는 입장이라면 영어 단어 100개만 알아도 충분하다는 말에 새삼 공감했다.
지하철 역사(驛舍)를 나서자 생각지도 못한 깜짝 환영 퍼프먼스가 펼쳐지고 있었다.
5월인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게 아닌가?
지하철 역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서쪽 방향으로 가는 기차의 출발역인 민스크 벨라루스카야 역이 보였다.
놀랍게도 초록색 페퍼민트 색깔이었다.
러시아의 색깔은 회색(灰色)일 거라고 믿었던 나에겐 충격적인 컬러였다.
너무 강렬했다. 뒤통수를 쿵하고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하얀 눈이 쏟아지고 선명한 페퍼민트 톤의 석조 건물역 앞에 가로등이 켜진 풍경(風景)은 동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서울에서 6613 km나 떨어진 머나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나는 화려한 5월의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황량함에 꽤 실망 했는데 이렇게 멋진 순간 속에 내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디즈니랜드 영화 겨울 왕국이 떠올랐다.
아렌델 왕국의 아름답고 강인한 여왕 엘사의 마법이 만들어 낸 눈의 궁전 같았다.
오 마이 갓! 러시아에서 5월의 크리스마스를 맞는 행운을 누리다니!!
감동이었다. 감사 감사할 뿐이었다.
한참만에 눈이 그치자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미끄러운 광장으로 걸어 나갔다.
길을 건너기 위해 에스칼레이터나 엘리베이터도 없는 지하도를 오르고 내려야 했지만 기분이 업이 되어서인지 전혀 힘들지 않았었다.
러시아는 회색이 아니라 페퍼민트 색이었다.
차가운 얼음나라가 아니라 포근한 눈꽃 나라였다.
무서운 곰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가슴 따뜻한 착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민스크 벨라루스카야 역은 눈에 번쩍 띄는 초록색 페퍼민트 칼러였다. 특이한 초록 빛깔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나스타샤가 감자 튀김을 먹고나서 남은 음식으로 접시에 사람 얼굴 모양을 만들었다. 재치가 돋보였다.
민스크 벨라루스카야 역은 눈에 번쩍 띄는 초록색 페퍼민트 칼러였다. 특이한 초록 빛깔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Drawing by 안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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