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새벽에 전화가 왔다. 글렌이다. 캠퍼스인에서 아침 7시에 시작하는 안전 수업에 참석하란다. 그럼 그렇지. 텍사스를 통해 미주리로 보낼 때부터 알아봤다. 원래는 어제 내게 연락했어야 했다. 어제 배달을 마쳤을 때 동부시간대에 있는 글렌은 이미 퇴근했다. 어젯밤에 짐을 받아 서둘러 떠나려고 했던 이유다. 화물이 없어 불발로 끝났다만.
지난주 두 건의 사고를 친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뭐가 쓰였던 거지. 아니면 정신이 해이해졌거나. 메사추세츠 배달처에서 교통표지판 쓰러트린 것 말고도, 메인에서 오다가 critical event 경고를 받았다. critical event는 사고에 준하는 위험한 운행을 뜻한다. 급정거, 과속, 균형상실이 여기 속한다. 크리티컬 이벤트 두 건이면 안전 교육을 이수하게 돼 있다. 25마일 제한속도 램프에서 곡선길을 30마일로 달렸는데도 방향 제어력을 잠깐 잃었다. 평소 같으면 그 정도 속도에서 그런 일은 안 생긴다. 그때 왼쪽으로 나를 추월해가던 트럭 때문에 안전 각도를 확보하지 못했다. 어쨌든 내가 더 속도를 줄였더라면 예방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정원이 찼으니 내일 수업에 들어가란다. 그럼 오늘 하루 공친다. 어제도 사실상 공쳤고 내일도 안전 수업 마치고 오후에나 출발할 수 있는데, 그나마 화물을 바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월부터 3월까지는 화물 비수기다. 스프링필드 본사는 대기하는 트럭도 많다. 달려야 돈을 버는 직업이다. 서 있으면 일은 하되 돈이 안 된다.
오늘 하루도 알차게 보내야지. 오강남 교수님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누가 독후감을 올리며 관련 영상도 있는 글을 링크했다. 스퐁 주교의 <요한복음 – 어느 유대인 신비주의자의 이야기>다. 원제는 The Fourth Gospel – Tales of Jewish Mystic이다. 독후감을 읽은 후 5개의 동영상을 연이어 시청했다. 스퐁 주교가 어느 교회의 요한복음 주간에 초대되어 닷새 동안 강연과 질의문답을 나눈 내용이다. 스퐁 주교는 성서해석에 문자주의를 경계하라고 강조한다. 성경이 쓰일 당시 시대적 상황과 역사,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해석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상당수가 실제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스퐁 주교의 강의를 듣고 성서에 대해 내가 가졌던 의문의 실타래가 약간은 풀렸다. 나는 성서에는 일획일점의 오류도 없다는 성서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이른바 축자영감설이다. 심지어 번역본까지도 그렇다는 것이다. 영어는 킹제임스 버전을, 한글은 개역한글판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나머지 역본은 뭐란 말인가? 성경 무오류설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성경관일 뿐이다. 성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쓰였고 편집까지 됐다는 게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필사와 번역 과정에서 숱한 오류가 있었고, 정치적 견해에 따라 어떤 문서들은 배제됐다. 스퐁 주교는 요한복음도 약 30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썼다고 얘기한다. 요한복음은 바울의 사상을 견제하는 성격이 있다고 하는데, 내 짧은 영어와 성경 지식으로는 상세한 내용 파악은 어려웠다.
성경에는 矛盾(모순)되는 내용이 많다. 복음서만 해도 세부 내용이 다르다. 구약을 처음 읽었을 때는 충격이 컸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의 전형 아닌가? 죄 없는 양민과 아이들까지 무차별로 학살하다니. 구약 성경이 이스라엘 역사서이며, 역사서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이고, 당시 이스라엘 관습은 사건을 과장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야 이해가 됐다. 지금도 정치인들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하는데 신정사회인 당시는 오죽했겠는가.
사람의 기억은 쉽게 왜곡된다. 같은 얘기도 입 몇 개만 지나가면 전혀 다른 얘기로 탈바꿈한다. 요즘은 명백한 동영상이 증거로 있어도 자기가 한 얘기가 아니라거나, 주어가 없다는 식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니 수천 년 전에 그것도 예수 사후 수십 년이 지나 쓰인 성서가 신문 기사처럼 정확할 것이라는 기대는 무리다.
교회를 다닐 때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성서의 예화를 실제 있었던 일인 양 설교할 때 난감했다. 문학을 다큐로 읽다니. 스퐁 주교도 얘기했다. 홍해가 얼마나 넓은지 아느냐고? 설령 홍해가 갈라졌다고 쳐도 시속 20마일(32Km) 속도로 노인들까지 포함한 행렬이 그 먼 거리를 지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하느님의 기적이 아니냐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수의 메시지는 기적에 있지 않다.
요즘 젊은이들이 교회에 오지 않아 말세라고 개탄하기 전에 시대에 맞는 비전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의 가르침은 죽어서 천국 가자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자였다. 2천년 전에도 그랬다.
나는 기독교 문외한이라 스퐁 주교 이름도 오늘 처음 들었다. 그가 기독교(Christianity)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 부분은 되새겨야 할 것이다. 교회 다닌다고 기독교인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으로 살아야 기독교인이다. 나는 기독교인인가?
Top 200 Risk Driver
일 년 전 오늘 나는 캠퍼스인에 있었다. 페이스북에 Memories라고 오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여주는 기능이 생겼다. 2전 3기 끝에 CDL 퍼밋을 취득하고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읽어도 지난해 글이 더 재미있다. 문장도 그다지 늘지 않았다.
캠퍼스인에 다시 왔다. 지난번처럼 가볍게 생각했다. 동영상 시청 교육, 심랩에서 시뮬레이터 실습을 마치면 되는 줄 알았다. 강사가 교육 이수증을 주며 나를 포함해 몇 명은 남으라고 했다. 이수증 말고 다른 안내용지가 더 있었다. 이럴 수가 무려 내가 Top 200 드라이버에 들어갔다. 이 무슨 가문의 (영광이 아닌) 수치란 말인가. Top 200 Risk Driver로 특별 관리 대상이다.
9개의 컴퓨터 동영상을 더 보고 시험도 친다. 그 뒤 시뮬레이터로 3개의 코스를 주행한다. 주행 결과는 안전부서로 보내진다. 그리고 안전부서 담당자를 만나 개별 면담을 진행하라고 돼 있다.
시뮬레이터 주행은 쉽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실제 운전보다 어려웠다. 두 번째 코스에서 아슬아슬 사고를 면했다. 눈길 주행에서는 잭나이프로 차선을 이탈했다. 이제 운전이 무섭다.
셔틀버스를 타고 본사로 가 Z건물에서 안전부서 담당자인 Dennis를 만났다. 전화 통화에서는 악센트를 느낄 수 없었는데 만나 보니 건장한 흑인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길, 당신에게는 몇 가지 고무적인 면과 우려되는 면이 있다. 우선 당신이 낸 사고는 경미하고 크리티컬 이벤트도 위험한 종류는 아니다. 당신이 차량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뜻이다. 다만 지난 6월 업그레이드를 한 이후 사고 건수가 많다는 점이 문제다.
솔로로 전향한 이후 내가 낸 사고는 다섯 건이다. 그중 하나는 손상이 경미해 보고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네 번이다. 차량 안정상실은 서너 번 된다. 크리티컬 이벤트 중에서 급브레이크와 과속, 전방 차량 충돌 위기와 비교하면 차량 안정상실은 약과다. 별로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차량이 한번 휘청하면 센서가 작동해 경보가 뜬다. 차량 전복 위기까지 간 적은 없다. 어쨌든 약 9개월의 기간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사고나 경고를 받았다는 얘기다. 결코, 좋은 성적이 아니다. 탑 200에 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쩌면 탑 100이나 50 아니 Top 10에도 들지 않을까? 남들은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냈다는 사고를 나는 이렇게 많이 쳤다. 경찰에 보고한 적은 없으므로 대외적으로나 공식적으로는 무사고다. 대형사고 한 번 치는 것보다는 잔 사고 여러 번 내는 게 낫긴 하다. 잔병치레하면서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 건강하다가도 암이나 심장마비로 한 방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데니스는 제안했다. 날씨가 어떻든 낯선 곳에 가면 이동 전에 내려서 확인해라. 내려서 확인하는 것을 제2의 천성으로 삼아라. 지금도 시야가 안 좋으면 항상 내려서 확인한다. 좋다. 계속 그렇게 해라. 그러고는 악수하고 헤어졌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드라이브 라인으로 화물을 받으러 갔다. 내일 아침 아칸소까지 배달하는 화물이 있는데 오늘 밤에나 들어온다. 거리가 얼마 안 된다. 그게 가장 빠른 것인가? 그렇다. 지금 화물이 별로 없다. 그거라도 달라. 본사를 빨리 벗어나는 게 낫다.
사흘째 공친다. 오늘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취소 처분 받은 주차위반 티켓 530달러가 마침내 오늘 환급됐다. 첫 번째 안전 교육 이수 후 사고 횟수가 확 줄었다. 그러다 지난주 연속 두 건을 쳤다. 교육 내용은 이미 여러 차례 학습했지만, 오늘은 특히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내 생애를 통틀어 다시는 사고가 없을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조만간 리즈 오퍼레이터로 전환을 앞두고 마지막 의식을 치른 기분이다.
트럭 운전대 잡은 지 일 년
벌써 일 년. 일 년 전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오리엔테이션 후 회사를 견학하고 패드(pad)에서 처음 밥테일 트럭을 직접 몰아봤다. 별 感興(감흥)은 없었지만. 그리고 네이슨을 만났다.
내가 수련을 마침과 동시에 네이슨은 회사를 떠났다. 나는 홀로 분투의 시간을 보냈다. 비록 위험한 운전사 200인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았지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버려야 할 나쁜 운전 습관. 뭔가를 찾느라 먼 곳에 집중하면 가까이 있는 상황에 주의를 못 돌린다. 어제도 트레일러 찾느라 야드를 돌다가 앞바퀴가 보도 경계석을 받았다. 아차 싶었다. 안전 교육받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지난번 거래처에서 사고도 그러다 냈다. 천문학자가 밤하늘을 보다가 우물에 빠진 격이다. 운전은 먼 곳도 봐야 하지만 가까운 거리가 더 중요하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자. 다른 하나는 곡선 구간에서 조금 속도를 줄이는 일이다. 다른 트럭에 비하면 그리 빠른 속도도 아니지만, 남들은 상관 말고 내가 편한 속도를 지키자. 이 두 가지만 조심하면 운전은 괜찮다.
오전 3시, 배달처에 도착했다. 체크인하니 야드에 주차하고 기다리면 아침에 누가 깨울 거란다. 앞줄에 놓인 다른 트레일러 옆에 주차했다. 잠시 후 내 옆에 트레일러를 내려놓은 야드자키가 말을 건다. 트레일러를 내려놓고 밥테일로 옆 마당에서 자란다. 아침에 짐 내리고 빈 트레일러를 거기 갖다 놓을 거라고.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자다가 중간에 안 일어나도 되고, 닥에 후진하는 수고도 덜고.
푹 자고 일어나니 내가 가져온 트레일러가 근처에 주차돼 있었다. 글렌에게서 다음 화물 예고가 들어왔다. 2시간 거리에서 정오에서 1시 사이 픽업이다. 3시에 도착했으니 10시간 휴식이면 1시에 출발할 수 있다. 8시간 수면이면 11시다. 1시간 여유 잡고 오후 2시에 도착 가능하다고 보냈더니 화물이 취소됐다. 총 거리가 370마일이 안 돼서 별 매력을 못 느꼈다. 다음 화물이 들어왔다. 총 거리가 800마일이 넘는다.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니 배달할 곳이 5곳이나 된다. 날짜도 4월 3일까지다. 오늘이 30일이니 무려 닷새가 소요된다. 하루 170마일도 안 되는 셈이다. 하루 일당이 약 80달러라는 얘기다. 장난하나. 컴퍼니 드라이버는 화물을 거부할 수도 없다. 어제 달린 거리를 합쳐도 천 마일이 안 되니 다음 주급은 500달러나 될까.
최근 며칠 일을 못 했고 이번에 받은 거리도 짧아 약이 올랐다. 아침에 명상하며 오기로 한 번 최대한 못 벌면 얼마나 못 버나 보자 생각했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현실화할 줄이야. 매일 명상을 한 이후로 생각하는 대로 잘 이뤄진다. 그런데 아직 마음을 정교하게 쓸 줄을 몰라 뜻한 바와 다른 쪽으로 굴러가기도 한다. 부정적 생각을 안 하려고 정치, 사회 뉴스도 멀리한다.
10마일 떨어진 타이슨에 왔다. 내일 새벽에나 화물이 준비된단다. 오늘 운행 거리는 꼴랑 10마일. 5달러 벌었다. 일당 5달러. 주차할 곳이 있으니 다행이랄까. 이런 식으로 돈 따지면 힘들어서 일 못 한다. 잘 되는 때도 있고, 안 되는 때도 있는 법이다. 택시 운전할 때도 하루 얼마나 벌어야 택시 임대료 내고 얼마가 내 몫이라는 계산이 있다. 그런데 오늘 지금까지 얼마 벌었나 따지면 일하기 힘들었다. 매번 손님 태울 때마다 한 건 한 건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루가 지나고 대체로 필요한 금액 이상을 벌었다. (물론 우버가 시장을 초토화하기 전 이야기다)
안 좋은 화물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쉬는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내 책임이다. 오늘은 종일 리즈 오퍼레이터가 되기 위한 절차와 사용 가능한 차종을 알아봤다. 2020년형 신형 트럭은 세 가지 선택이 있다. Freightliner, Peterbilt, International이다. Volvo는 25대가 테스트 중이다. 인터네셔널은 바로 계약 가능하지만, 다른 모델은 주문하고 석 달을 기다려야 한다. 당장은 프레이트라이너를 일순위로 둔다. 그다음으로 2020년형 인터네셔널은 전작에 비해 크게 좋아졌다는 평이 있고, 디자인도 잘 나왔다. 네이슨의 트럭이 2019년형 피터빌트였다. 타면서 몇 번 문제를 일으켜 그다지 인상이 좋지는 않다. 세 트럭 메이커 모두 성능과 기능은 충분하다. 다소 뽑기 운이 작용하는 듯하다.
중고 트럭을 리즈하는 방법도 있다. 임대료가 약간 싸고 계약 기간이 짧은 장점이 있다. 새 트럭을 주문하고 받을 때까지 지금 타는 가이암을 리즈할 수도 있다. 트럭을 바꾸는 일은 시간도 걸리고 번거로운 일이다. 가이암은 요즘 별문제 없이 잘 달린다. 하지만 여름에 아이들과 다닐 생각을 하면 2층 침대가 있는 모델로 바꿔야 한다.
성서와 GPS
오늘도 종일 기다렸다. 날짜를 착각했다. 화물은 오늘 새벽이 아니라 일요일인 내일 새벽에나 준비된다. 거의 이틀을 앉아서 기다려야 하다니 지겹다. 지겨우면 지는 거다. 할 일을 찾자.
스퐁 주교(John Shelby Spong),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에먼(Bart D. Ehman), 보그(Marcus Borg), 라이트(N. T. Wright) 등 진보 신학자들의 인터뷰와 강연 동영상을 봤다. (크로산 박사와는 페친도 맺었다)
나는 모태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를 접하기 전에 다른 종교 사상과 철학을 涉獵(섭렵)했다. 근래에는 과학, 특히 천문학, 뇌과학, 인지과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다. 이렇게 형성된 내 세계관과 교회에서의 가르침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주말 크리스천이 되는 방법뿐이었다. 일요일에만 이성을 마비시키자. 그러다 현대인의 시점에서 기독교와 성서를 재해석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진보 서구 신학자들의 저서는 한국기독교연구소를 통해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가,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가? 물으면 대부분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존재한다고 답할 것이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가? 물으면 답이 반반으로 나뉠 것이다. 신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가, 사람이 신을 위해 존재하는가? 물으면 다수가 사람이 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세 가지 질문은 같은 내용이다. 법, 종교, 신 모두 사람의 관념에 존재하는 추상 개념이다. 그런데도 유독 종교와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답이 달라진다. 신의 영광을 위해 죽어도 좋다며 폭탄 조끼를 매거나, 교당에 기관총을 난사한다. 정말 신이 그것을 바랬을까?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신이 창조한 것일까?
최근 오강남 교수님의 페북 게시물 답글에 자기 외동아들이 남자를 데려와 사랑하는 사이니 인정해 달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두 놈을 다 때려죽이겠다며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다. 소름 끼쳤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신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전능한 창조주가 만든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완벽할 수밖에 없다.
성서는 삶의 GPS다. 모르는 길을 찾아가기는 상당한 도전이다. 트럭 수련 초기 나는 길을 잘 몰라 GPS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 길은 안 보고 GPS만 보고 다닐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네이슨은 호통을 쳤다. 길을 보라고! GPS가 항상 정확하진 않다. 날씨나 사고로 경로가 바뀐다. 공사로 지형이 달라진 곳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당황했다. 아니 길이 왜 이래. GPS랑 다르잖아. 나는 GPS 따라갈 거야. 그러다 여러 차례 길을 잘못 들었다. GPS는 참고만 해야지 절대적으로 따르면 위험하다. 요즘은 GPS로 대략의 코스를 확인하고, 주행은 도로 표지판을 보고 간다. 그래야 안전하다. 최신판 지도 데이터도 제한속도, 출구 번호 등 실제 도로 표지와 다른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든 현실이 우선이다. 수천 년 전 다른 나라에서 당대 상황에 맞춰 쓰인 성서를 문자 그대로 오늘날 현실에 적용하기는 무리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다고 오래된 GPS 지도를 따라 도로 주행을 할 수는 없다. 내가 성서를 21세기 오늘날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려는 이유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