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30만명 희생..현대사 최대 비극
8.15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전후 전국적으로 자행된 민간인虐殺(학살)은 현대사의 최대비극이다. 이 엄청난 제노사이드는 권위주의 독재정권에서 철저히 은폐되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대한민국의 흑역사다. 민간인학살 희생자 수는 정확히 모른다. 4.19혁명 후 제4대 국회에서 설치된 과거사위원회에서 114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발표가 있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현재 유족회들은 100만에서 최대 130만으로 주장하고 있다. 학자들도 최소 35만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한다. 국방부집계 민간인 사망자와 행방불명은 67만6811명이지만 후방에서 자행된 학살희생자와 전쟁이전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희생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민간인 학살원인과 배경
1945년 조국해방은 독립을 가져왔으나 분단의 원인이기도 했다. 1945년 8월11일 소련군이 함경북도 웅기를 점령하자 미국은 황급히 38선을 경계로 분할점령을 제의하고 소련은 이를 수락했다. 미국과 소련의 목표는 한반도를 자기네 위성국으로 두려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은 한반도를 태평양지역의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 최전선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38선 이남에 친미정권 수립이 시급했다. 미국은 미국시민권자인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짐받고 그의 집권을 지원했다. 소련도 소련군 장교신분인 김일성의 집권을 지원했다. 해방 후 남한의 통치권은 미군정에 있었고 북한 통치권 역시 소련군정에 있었다. 남북한국민들은 일제 때 收奪(수탈)당한 경험으로 국민들 80% 이상이 농지개혁과 평등을 추구하며 단독정부가 아닌 통일된 독립조국을 원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들을 좌익세력으로 규정하고 척결하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민 10%가 넘는 3만 가까운 희생자를 낸 4.3항쟁과 1만여 희생자를 낸 여순 항쟁사건이 발생했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좌익세력 척결을 목표로 전국의 좌익인사를 사면하고 교도한다는 명분으로 ‘보도연맹’에 등록하도록 했다. 1949년 6월부터 전국적으로 등록된 사람이 35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대부분 사회주의 “사“도 모른 채 이념이 아닌 할당목표를 채우려는 경찰과 읍면 행정기관의 독려와 식량배급이나 신분증을 만들어 준다는 甘言利說(감언이설)에 속아 등록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중학생 등 어린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말단 읍면 행정기관의 할당 목표를 채우기 위해 급급했던 사정을 보여준다.
민간인 학살 전개 과정
북한군 남침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남한 내 좌익세력이 동조해 후방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보도연맹원과 전국 교도소 수감자들을 처형했다. 특히 교도소 수감자 희생자들 가운데는 만기 석방을 며칠 앞둔 사람들과 경범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미처 피난하지 못한 서울시민과 지방주민들은 인민군 赴役(부역)에 동원되었다는 혐의로 아무 절차 없이 피난에서 돌아 온 세력에 의해 무작위로 희생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2018년 5월 유해발굴이 끝난 충남 아산군 배방면 설화산 학살지의 경우 발굴된 208구 유해 모두 가임기 여성들과 생후 몇 개월부터 10세 미만 어린아이들이다. 학살은 전후방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자행되었다. 군인에 의한 학살 처형장에는 대부분 미군이 입회하여 지휘했다. 특히 서해안과 서해안 남해안에서는 희생자의 손발을 묶어 배에 실어 水葬(수장)한 경우가 많았다.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가족의 아픔 ‘연좌제’
희생자 유족들은 오랜 세월 ‘빨갱이가족’으로 취급되어 연좌제에 묶여 대대로 신분상 심한 불이익을 받았다. 장교나 공무원임용 대기업취업은 생각도 못하고 2등 국민으로 숨죽이며 살아왔다. 5.18 광주학살 사건 후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은 민심수습용으로 80년 개정헌법 13조 3항에 “모든 국민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한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조항을 넣어 1981년 3월25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고대로부터 내려 온 연좌제는 박정희도 민심수습 차원에서 1963년 '대선공약'과 1971년 대선 '완전폐지' 선언으로 두 번이나 철폐를 공약했다. 그러나 없앴다는 연좌제는 '권력의 밀실'에 계속 도사렸고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고급 공무원 또는 고급장교 등의 정밀 신원조회 때 참고자료로 쓰인다는 합리적 의심을 받고 있다.
진상규명 명예회복 유해발굴
2005년 노무현정부는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대한민국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를 정부 독립기관으로 발족시켰다. 진화위는 2006년 4월25일부터 4년2개월간 총 11,172건 조사를 마무리했다. 진화위는 문헌자료를 검토를 기본으로 신청인 참고인 진술을 청취하고 현장을 직접 방문조사했다. 조사보고서는 전체 심의를 거쳐 국가로부터 피해가 확인된 경우 국가 공식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취해줄 것을 권고했다. 또한 위원회는 도시개발 등 발굴이 불가능한 곳을 제외한 전국 168곳 집단매장지 가운데 11곳 유해발굴을 완료했다. 5년 시한으로 설치된 진화위는 민간인학살 피해가 예상외로 광범위하고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기간연장이 불가피했으나 이명박 정부의 연장 거부로 2010년12월31일 종료됐다.
이상 사진 미주진실화해모임 제공
향후 과제와 전망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재개를 호소하고 있다. 유해발굴은 진보성향 지자체장 도움으로 아산, 세종시, 충북 보은 등 몇 곳을 간헐적으로 발굴했다. 그러나 나머지 150여 곳은 예산확보가 불가능해 손대지 못하고 있다. 이제 희생자 유족은 거의 사망하고 2대 3대 유족들이 한 맺힌 상처를 안고 그늘에서 살아가고 있다. 남북화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구성원 사이의 화해다. 민간인학살이 매듭지어지지 않는 한 민족화해는 불가능하다. 유엔은 1948년 12월9일 종교, 이념 어떠한 이유로든 학살을 금지하는 ‘제노사이드협약을 결의안으로 채택했다. 협약에는 유엔가입국과 비가입국 137개국이 가입했고 대한민국도 1950년 7월 가입했다. 그러나 민간인학살의 많은 부분을 협약가입 후 자행해 국제협약을 명백히 위반했다. 이는 유엔인권위원회 제소의 뚜렷한 명분이다. 현재 국회에는 진실화해 위원회 재개를 골자로 9개 법안이 발의되어 있다. 그러나 정당 간 이해가 엇갈려 계속 보류중이다. 대부분 젊은 세대들은 민간인학살 역사를 알지 못한다. 철저히 감추어져 왔으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주 진실화해‘ 모임은 우선 민간인학살 역사를 널리 알려 화해에 대한 공감대를 넓힐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에 과거사법 재개를 강력히 촉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의 인권단체들과 연대해 유엔인권위원회 제소 등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국내와 해외동포들의 관심과 성원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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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도 및 학살현장 답사보고
미주 진실화해 모임은 4월28일(일) 오후 4시 플러싱 중앙장의사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추도를 겸한 현장답사 보고회를 개최합니다. 130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지난 해 출범한 미주진실화해 모임 신대식 목사(워싱턴)와 저 장기풍(뉴욕)은 지난 3월 한국의 주요 민간인 학살과 유해발굴 현장을 답사하고 각 지역 유족들과 유족단체 회장들과 여러 차례 간담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그 결과를 영상과 함께 보고하고 해방 후 조국의 흑역사인 민간인 학살 실태를 동포사회에 알리려는 취지에서 보고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날 미네소타 거주 이창재 선생의 ‘4.19혁명 전후 비사와 민족화해’에 대한 강연을 함께 합니다. 이창재 선생은 서울문리대 4.19주역으로 당시 혁명과정에 깊이 관여한 주인공으로 조국의 격동기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남북관계와 민족화해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관심 있는 동포들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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