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동티모르 분쟁 당시 유엔 결의에 의해 동티모르에 파견된 동티모르 국제군(INTERFET)의 모습. 동티모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조직된 다국적 유엔 평화유지군에는 호주군 및 한국군(상록수부대)도 참가했었다.
웨스트 파푸아의 눈물
요즘 서 파푸아 뉴기니 사람들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 인도네시아와 맞서 싸우고 있다. 벌서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다. 이 사건은 나에게 20년 전 1999년 동티모르가 독립전쟁을 치를 때의 모습이 데자뷰로 떠오른다.
당시 동티모르인들의 끈질긴 독립투쟁이 500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지만 그 희생은 너무도 가혹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할 때 독립을 반대하는 친인도네시아 세력(우리로 말하면 친일파)에 대한 독립지지 세력들의 무차별 학살로 80만의 인구 중 1/4인 20만, 비율로만 본다면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조그만 섬나라의 문제였지만 인도네시아가 쫓겨 가는 틈에 동티모르에 한 몫 끼어들려는 호주의 입장에서는 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어 매일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다. 매일 매일 그들의 부모 형제자매가 살육을 당하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서티모르로 피난을 가는 화면들이 호주 TV를 통하여 시시각각으로 보도가 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한 FM 98.5 방송에서 일 주일에 한 시간씩 위탁을 받아 한국어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한국어 방송 앞 시간이 동티모르 방송 시간이었다. 사실 한국어 방송은 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절박한 처지인 그들에게는 1 주일의 중의 단 한 시간의 방송이 동족을 대상으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어서 황금처럼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들의 방송 시간에는 좁은 스튜디오가 시장통처럼 북적대면서 눈물과 비탄의 분위기로 가득했다. 방송을 하다가 스텝들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스튜디오를 튀어 나오는 일이 빈번했다.
아무리 보람 있고 좋아도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은 오래 하다보면 신명이 나지 않는 법이라서 당시 나는 방송 타는 것이 좋아서 제멋에 겨워서 출연하는 자원 봉사 스텝들을 데리고 의무적으로 방송시간을 겨우 겨우 메워 가고 있었다. 스텝들은 대부분 한국에 가서 직업을 구할 때 방송 경험을 써먹으려는 매스컴 전공 유학생들이나 연예지망생들이었다. 내 수첩에는 방송을 희망하는 유학생들의 연락처가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자기 멋대로 공중파를 타는 일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티모르인들이 긴장 속에 방송 시간을 조금이라도 넘기면 대기하고 있는 우리 측 스텝들은 짜증을 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천천히 하라고 했다. 생존의 위기에 서 있는 그들의 방송이 우리 방송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통째로 우리 방송 시간까지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눈에는 바로 자기들의 눈앞에서 지구상의 한 나라 사람들이 미증유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한국의 연예계 소식이나 들고 나와서 기껏 자기들의 '끼'나 발휘해보려는 철딱서니 없는 유학생들이 오히려 한심스러워 보였다.
결코 잊히지 않는 것은 그들 방송의 시그널 음악이었던 동티모르 토속 음악이었다. 마치 흑인들이 춤을 출 때 부르는 노래처럼 단조로우면서 코믹한 리듬이었지만 그 리듬이 내게는 무척 슬프게 들렸다. 가사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이 “저들은 우리를 게으르다고 하네”라는 구절이었다.
500년 동안 포르투갈에 식민지로 있으면서 무시를 당하고 살았던 삶을 자조하는 가사였다. 그런데 그 가사를 보고 전혀 남의 나라 노래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알아본다는 말처럼 우리도 일본 놈들에게 ‘조센징’이라고 무시당하며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드니에는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일로 시위를 할 일은 없고 항상 고국의 궂은일에 나서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한국에 대하여 올바른 상식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직접 몸으로 시위에 참여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매번 참여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귀한 이들이다. 이들은 고국에 궂은일이 생길 때 마다 희생적으로 생업을 잠시 접어두고라도 나서는 것이다.
사실 아무리 민주주의 나라라고 해도 남의 나라에서 외국인들 틈에서 한국말로 쓴 피켓을 들고 한국말로 구호를 외치는 일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중국인들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일신의 안녕을 잊고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때는 중국 사람들도 조선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나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한국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남의 나라 사람들은 “쟤들 왜 저러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약간의 쪽팔림은 있기 때문에 제발 한국에 별 일이 없어서 외국에서 더 이상 쪽 팔리는 집회를 할 필요가 없으면 좋겠다. 약간의 희생은 참을 수 있지만 쪽팔림은 참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