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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리고 여자

 

이영덕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내 나이가 몇 살쯤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많은 변화들을 겪어내고 있으니 짧지 않은 세월을 사는 것 같소. 내가 뿌리를 내린 이곳은 오랫동안 강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평화로운 산속이었소. 그런데 어느 날 인간들이 경계선을 긋고 국립공원의 안과 밖으로 분리를 하더군요. 그 선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지는 않았지만 울타리 안의 금수저 나무들은 보호를 받아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었고 선 밖으로 밀려난 흙수저 나무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암울한 미래로 내몰린 것이지요. 나는 몇 미터 아슬아슬하게 밀려 담장 밖의 길거리나무 신세가 되었다오. 길을 내기 위해 집을 더 짓기 위해 많은 나무들이 제거되는 처참한 모습을 보며 나도 천수를 누리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주라는 나라에서 보호종인 유칼립투스라는 종자로 생겨나 웬만하면 다른 나무들 보다는 보호를 받고 있다는 점이요. 또 길거리 나무로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음은 큰 위로가 되었소. 어디서 떼어다 놓은 듯 한 폭의 그림 같은 조화를 이루고 서있는 나와 두 동료 그리고 큰 거북바위의 모습은 그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었지요. 적어도 한때는…

 

바위의 형상은 마치 거대한 거북이가 목을 길게 빼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그를 둘러싸고 서있는 나와 두 동료는 의좋은 형제처럼 개선장군같이 버티고 있었소. 혈기왕성하던 시절 바위 때문에 허리는 휘어졌던 몸이었지만 우리들은 거친 껍질의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연회색과 은빛으로 빛나던 건강하고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기도 했지요. 그 좋은 시절에 그녀가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소. 예전엔 자주 볼 수 없었던 동양여자였소. 살짝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서 스케치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쉬다 가곤 했지요. 어느 날엔 커피를 들고 와 내 코를 자극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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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소. 녹녹치 않은 이민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게 살다 보니 못 오겠지, 빠르게 하이웨이를 오가겠지.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찾아온 그녀가 쳐진 어깨를 내 등에 기대고 생기가 사라진 얼굴을 숙이며 중얼거렸소.

“나무야, 내 아이들이 새로운 희망의 땅에 열매 맞게 하려고 내 뿌리를 싹둑 잘라 버리고 이민을 선택했지만 뿌리 없는 삶이 너무 힘들고 외롭구나.”

나무로서 내 생명의 시작이며 마지막이기도 한 땅에서 뿌리를 잘라 내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기에 마음이 아려왔지만 미풍으로밖에 그녀를 위로할 방법이 없었소. 그 후 또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고 자동차들의 통행이 많아지며 도로 확장공사가 시작됐소. 이름 모를 많은 나무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공포에 떨고 있는데 자전거 도로까지 만든다며 제거작업이 거북이의 코앞까지 파고 들어왔소. 그때 내 옆 두 동료의 휘인 몸이 도로를 방해한다며 거의 다 잘려 나갔다오. 그나마 보호종이라고 뿌리와 몸뚱이 조금은 남겨놓은 채. 조화와 균형이 사라진 어색한 그림 속의 나는 외면당했고 외로웠소. 그때 어디선가 보고 있었던 듯 그녀가 다가왔소. 주름진 눈가에 그렁거리던 눈물은 처참해진 나의 모습 때문인지 그녀의 서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난장이처럼 짧아진 몸뚱이로 서있는 내 동료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바위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소.

“나무야 너희들의 뿌리를 짓누르며 등을 굽게 하고 결국 절단 당하게 한 이 바위가 원망스럽지 않니?”

그녀를 비추고 있는 뜨거운 햇살을 그늘로 슬며시 가려주며 내가 말해주었소.

“나의 어머니인 땅이 나를 품어 잉태할 때 하필이면 커다란 바위 옆 구석이었지. 그게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어. 어려서 바위보다 작을 때는 햇빛을 받으려고, 바위에 눌려서 허리가 휘어져 자라려니 양지바른 곳의 나무를 부러워하고, 바위를 많이 원망했었지. 하지만 건강하게 성장해서 올려다보던 바위가 저 아래로 내려다보일 때쯤 장애물이나 아픔이 아닌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더군. 만일 내가 똑바로 자라기를 고집했다면 일찍 죽어버렸겠지. 그리고 지금 힘들고 외로운 나는 그 바위를 의지하며 살고 있어.”

 

그녀가 다녀간 지 얼마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던 동료들의 몸통에서 아주 조그맣고 귀여운 연초록의 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했소. 어머니의 태반처럼 그 새싹들이 자라나 다시 조화롭고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꿈을 갖고 살아가려 하오. 그 여자도 뿌리가 잘리는 고통과 외로움으로 키워낸 자식들이 새 땅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위로 받고 행복하기를 빌고 있소.

나무와 여자는 비슷한 사명과 운명을 갖고 생겨난 창조물이 아닐까 싶소. 자연적 순수한 본성을 지닌, 다양한 생명체의 모체인 땅속 깊이 뿌리를 묻고 그 경계를 뚫고 하늘을 향해 자라나 지하와 지상을 동시에 살며 생명의 입김을 불어주는 신비스런 존재, 나무. 인간생명체의 근원인 자궁을 갖고 태어나 자신의 몸속에서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이음줄, 어머니라는 이름과 여자라는 이름을 동시에 살며 자식을 위해 자신의 뿌리나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신비스런 존재, 여자.

부디 나무와 여자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주물주의 뜻을 인간들이 성찰하기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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