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적 민족주의
100년전 3.1운동이 일어날 때는 민족주의가 사회 풍조였다. 대규모의 살육전이 된 1차대전도 편협한 민족주의가 일으킨 비극이다. 거시적으로 1차대전을 본다면 전제군주라는 구시대의 잔재가 사라지고 민주주의나 대중 문화가 시작되는 현대사회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성의 사회진출로 성평등의 첫걸음이 되었지만 전사자만 천 만명 기록한 끔찍한 살육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대규모 살육전을 민족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슬라브족의 좌장 러시아, 게르만족 대표 오스트리아(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결에 보불전쟁으로 알사스 로렌을 독일에 빼앗긴 프랑스의 보복이 주요원인이다. 이것을 프랑스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프랑스라는 나라는 있어도 프랑스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1차대전을 설명하는 민족주의는 nationalism으로 우리가 한민족, 백의민족이라고 할 때 쓰는 민족이란 단어와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
3대 민족주의 축이 부딪치자 동맹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딸려 나와 세계대전으로 번졌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불을 당긴 것이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출발
계몽주의는 유럽사회를 바꿔 놓았다. 이성과 합리주의는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민중은 중세의 무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루소를 정신적 아버지로 모셨다. 혁명정부는 교회, 카톨릭을 미신으로 간주해 노틀담 성당 일부를 마구간으로 개조하고 이성의 신을 섬기게 했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은 인권, 평등, 자유로 민주주의의 기틀을 놓았지만 역사는 반드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선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유럽 대륙을 석권한 나폴레옹의 군사 패권주의, 후발주자 프러시아의 독일 통일로 유럽은 애국주의, 군국주의, 국가지상주의, 민족주의 열풍에 휩쌓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인의 정신을 사로잡은 사회진화론은 타오르는 유럽 애국주의 민족주의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강자와 약자가 서로 어울려 사는 게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착취당하기 싫고 지배당하기 싫으면 너도 힘을 길러 강자가 되라.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는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어 아프리카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들이 유럽, 미국,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했다.
히틀러의 나치는 선택받고 우수한 아리안족이 세계를 지배할 사명을 가졌다고 민중을 현혹해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일본은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논리로 남의 나라 침략과 약탈을 정당화했다.
팔굉일우에 대해 좀더 설명을 하자면 팔굉(八紘)은 천하를 연결하는 여덟 개의 밧줄이라는 말로 한자의 본고장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즉 족보에 있는 말이다. 일우(一宇)는 하나의 지붕이라는 뜻으로 전 세계가 하나의 지붕으로 되어 있다는 소리다.
이 말은 일본의 단군이라는 신무천황(神武天皇 진무덴노)가 일본 열도 통일을 꿈꾸며 “팔굉을 덮어 집으로 삼으면 좋지 않겠는가”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일본이 명치유신 후 약소국을 침략하며 “천하가 덴노의 지배하에 있다”는 뜻으로 왜곡했다.
신화는 합리성이나 역사적 진실성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믿어왔느냐가 중요한데 신무천황이 재위했다는 기원전 660년에 한반도의 기록은 어떠했는가, 중국에서는 기원전 660년 어떤 기록이 있었는가를 교차 검증해보면 신무천황 신화가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다.
저항적 민족주의
우리나라나 중국처럼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는 외침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 민족저항은 사회적 담론이 되었다. 특히1917년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 횡포에 신음하는 약소국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는 약소국 독립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3.1운동이 러시아의 직접 도움을 받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 수립 후 사회주의자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독립과 병행하게 되었다.
제국주의는 일부 부역세력을 제외하고 그 민족전체를 수탈 대상으로 삼아 고통을 받게 하였다. 수탈의 부담을 직접 담당하는 농민, 노동자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어 광범위한 저항세력이 형성되었다.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에 따르면 조선 민중 3%가 3.1운동에 직접 참가했다.
101년전에는 3월, 4월 두 달 동안 전국이 대한독립만세로 뒤덮였다. 3.1운동은 그 자체로는 성공을 하지 못했다. 윤치호 말 대로 만세나 부른다고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3.1운동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표본으로 중국의 5.4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제국주의 학정에 신음하던 제3세계에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3.1운동은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리고 임시정부를 세우는데 직접 역할을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임시정부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도 광복전쟁을 수행하며 역사적 연속성을 분명히 했다.
3.1운동 이후의 변화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후 일제는 힘으로 조선민중을 억눌렀으나 저항적 민족주의 벽에 부딪히자 조선 민중을 유화하기 위해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교육기관이 늘어나고 신문발행이 허용되고 지방행정에 조선인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통치건 무단통치건 조선민중을 기만하고 분열시키고 이간질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상황이 변하자 제국주의는 매판자본과 부역자를 내세워 제국주의에 굴복하며 협조 타협하는 개량주의로 민족독립과 발전을 도모한다는 반민중적 통치로 입장을 바꾸었다. 문화통치로 바뀌며 일제는 친일파들을 앞세워 민중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나치 부역자를 프랑스어로 콜라보라퇴르(collaborateur) 간단히 콜라보라고 하는데 프랑스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단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친일 부역자를 부왜노라고 불렀고 매일신보에서는 토왜, 토착왜구라고 불렀다.
콜라보가 되었던 토착왜구가 되었던 부역자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이 몸담고 살던 공동체를 배반한 무리들이다. 그러나 콜라보와 토착왜구는 달랐다. 프랑스의 콜라보는 공동체를 배반한 댓가를 엄중하게 치렀으나 토착왜구들은 굴곡진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반공을 이용하고 독재권력에 빌붙어 주류세력으로 살아 남아 독립운동을 폄하하고 일제 치하의 피해자인 강제 징용자와 위안부의 인격을 는 능욕하고 있다.
역사부정법 제정 필요성
유럽에는 역사부정죄가 있다. 18개국에서 역사부정죄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역사부정죄가 입법 시행되면 식민지배가 축복이라고 했던 한승조, 사회진화론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빠진 이영훈, 위안부를 매춘이라고 매도하는 류석춘 등 학문을 가장해 일본 제국주의의 반 인륜 범죄를 찬양 고무하는 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북한군 600명이 광주에 침입했다고 우기는 지만원도 처벌받는다.
유럽에서 시행되는 역사부정법은 역사적 진실추구를 법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진리를 국가가 독점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 사실 전체나 어떤 추상적 사실이 아니라 유태인 학살 같은 특정시기, 특정지역에서 나타난 학살이나 인종청소 등 반인륜적 범죄의 진실규명이다.
이 법은 반 인륜적 사건의 피해자나 저항자에 대한 명예훼손, 인간 존엄 침해, 혐오표현을 처벌하는데 목적이 있다. 즉 위안부를 메춘부라고 매도하거나 강제 징용자를 임금 노동자로 변조하는 반 인도적 인권침해 발언을 처벌하는 것이다.
역사부정법 제정에 대해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작년 2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는 응답자 58%가 역사부정법 제정에 찬성하고 있다. 불필요하다는 응답자는 33%, 10.4%는 무응답 혹은 모른다고 응답했다. 응답자 중 지한당(현재 미통당) 지지자들의 65%는 역사부정법이 필요 없다고 응답했다.
역사부정법 제정에는 민주주의 가치인 표현의 자유 다양성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유럽인권재판소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예술의 형태 등 스스로 선택하는 기타의 방법을 통해 포함되나 국가안보, 공공질서 등 도덕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법률로써 제한될 수 있다’며 그 기준을 엄격하게 규정했다.
지난 8월에는 심상정 의원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을 개정해 보복보다는 진실, 화해 차원에서 접근하되, 고의로 역사를 왜곡하고 피해자를 모욕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법 제정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형사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올바른 역사교육이나 홍보를 통해 잘못된 역사적 시각을 바로잡는 노력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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