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최근 무소유와 풀소유가 화두가 되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맞을까요. 화제의 주인공이 된 혜민 스님은 정말 풀소유일까요. 제 생각에 그분은 풀소유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스님을 편드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완전히 무소유일 수도 풀소유일 수도 없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소유입니다. 그러나 무소유와 풀소유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지향점으로 존재해야 하는 푯대이기 때문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혜민 스님을 보았습니다. 정말 잘 생겼습니다. 잘 생긴 것도 일종의 소유입니다. 정말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얻을 수 있을 만큼 잘 생겼습니다. 그분이 꼴값을 했다고 말하면 화가 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꼴값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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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민 스님 ⓒ 나무위키
 
리오넨이라는 일본의 유명한 여승이 있습니다. 그녀는 177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유명한 슁옌 장군의 손녀로서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요 가장 훌륭한 시인이었습니다. 열일곱 살에 벌써 궁녀로 간택되어 황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황녀가 갑작스레 죽게 되자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만물이 스쳐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강제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가족들과 남편으로부터 자녀 셋을 낳은 다음에는 자유의 몸이 되어 여승이 되어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낸 리오넨은 스물다섯 살 때 그 조건을 채웠습니다. 남편의 간청이나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깎고 리오넨-분명하게 이해한다는 뜻-이라는 이름을 택하고는 진리를 찾아 떠났습니다.

리오넨은 에도의 테추큐 선사에게 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청했습니다. 선사는 그녀를 힐끗 보고는 너무 아름답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다음에는 하쿠오 선사에게 갔는데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아름다움은 골칫거리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리오넨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다리미로 얼굴을 문질러 육체의 이름다움을 영원히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쿠오 선사에게 돌아가자 그제서야 제자로 받아주었습니다. 리오넨은 이 일을 기념하는 시를 지어 작은 거울 뒷면에 새겼습니다.

황녀의 하녀로서
나는 아름다운 옷에 향내를 풍기기 위해 향을 피웠네.
이제 집 없는 거지로서
나는 선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얼굴을 태웠네.


참으로 대단한 결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종교에는 이와 같은 결기가 필수적입니다. 이런 결기가 없이 가는 종교의 길이란 무의미합니다. 특히 리오넨이 아이 셋을 낳은 후에도 그 결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그가 아이를 허투루 키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남편과 살면서 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버려둔 채로 자신이 가려던 길을 갔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도 이런 결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런 마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오롯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지막 십자가의 자리에서 제자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던 결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결기가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게 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있는 그 결기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당신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제자들에게 그런 결기가 없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꼴값을 언급한 것은 혜민 스님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꼴값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장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장점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 사람에게 꼴값으로 작용합니다. 사실 선을 한다는 것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은 선의 기본이며 모든 구도자들의 기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의 의미는 도를 좇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진리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좇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이 되었던 관상기도가 되었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와 결기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리오넨의 생애를 묵상해보십시오. 그가 한 모든 선택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모험이었습니다. 여인이 자신의 얼굴을 다리미로 문지르는 것은 일종의 종교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욕망을 그렇게 다리미로 문질러야 합니다. 어쩌면 혜민 스님도 자신의 욕망을 다리미로 문지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현각 스님의 지적이야말로 그를 위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혜민 스님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절로 들어가 다시 정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다시 전병욱과 양희송과 그동안 사람들의 입에 올랐던 많은 목사들이 생각납니다. 그 사람들이 혜민 스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 닥쳤던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 진리의 길로 향하게 하는 죽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어쩌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지금처럼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무소유와 풀소유입니다. 사람들은 무소유와 풀소유를 마치 생생한 실체처럼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무소유는 없습니다. 풀소유도 없습니다. 무소유의 대명사인 법정 스님에게도 소유가 있었고 죽은 후에도 재산이 늘어난 이건희 회장도 풀소유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인 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생명 그 자체가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양 극단으로 우리의 지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혜민은 무소유를 지향했습니다. 거기에 토를 달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비록 그가 풀소유라는 빈정거림을 받았지만 만일 그가 무소유를 지향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향락에 빠질 수 있었고, 또 현각으로부터 지적을 받았을 때 그를 받아쳤을 것입니다. 그러는 너는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그러면 다시 현각의 부족함이 부각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서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진흙탕 사건으로 기록이 되었을 것입니다.

혜민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정진할 것입니다. 그의 정진이 이번에는 좀 더 깊은 선의 세계로 그를 안내했으면 좋겠습니다. 현각 역시 그런 지적을 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좀 더 깊은 선의 세계로 향하는 동력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노력과 발자취가 후세들의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혜민과 현각 모두 범인凡人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분들을 손가락질을 하며 조롱하고 비난을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또 그러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흘러갈 때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모순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은 모순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거기에서 최선을 가리고 지향하는 것이 구도자요 순례자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리오넨의 결기가 새삼 존경스러운 것은 그것이 데리다가 말했던 ‘불가능성에의 열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게 과연 그런 결기가 있는가. 그것을 돌아보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 앞에 다시 서는 용기(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얼굴을 태우는)를 구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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