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했다. 국가비상사태라는 이유에서다.
“북한의 제4차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국가안보와 국민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북한이 국가기간 시설에 대한 테러 등 대남 테러 역량을 결집하고 있다”는 정부발표가 국가비상사태의 근거다.
1971년 유신체제의 시작, 79년 유신의 종말, 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에 따른 비상계엄 이후 네 번째 맞는 국가비상사태다. 지금까지는 모두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것인데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것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개성공단 전면폐쇄 → 사드(THAAD) 배치협의 →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나리오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박 대통령이 16일 국회 연설에서 테러방지법 통과를 강조한 이후 정부여당이 ‘안보위기 프레임'을 가동해 연일 언론 플레이를 펼치면서 그 윤곽이 드러났다.
25일 현재 야당 소속 의원들은 밤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이어가며 테러방지법 입법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야당이 52년 만에 필리버스터라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해 법안 통과를 저지하고 있는 ‘테러방지법'의 주요 골자는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키는 것이다.
야권의 우려대로 테러방지법은 도·감청 등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정원의 권한남용과 비대화 등의 논란 소지가 많은 것으로 지적돼 왔다. 이 법이 통과되면, 국정원은 테러 위험 인물의 출입국과 금융거래, 통신정보를 수집하고 금융기록 조회와 통화 내역 감청도 할 수 있다. 국정원이 테러 위험 인물로 지목하면 누구나 감시 대상에 포함될 수 있게 한 모호한 조항들도 문제다. 민간인 사찰과 야당 감시에 악용될 수 있다는 게 야당측의 주장이다.
국정원이 그동안 각종 불법 도·감청, 간첩조작사건, 대선개입 의혹 등에 연루되면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이 원죄다. 지난 대선개입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국민 신뢰를 되찾을 개혁이나 제도적 장치, 자정 노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광범위한 정보수집 권한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 정서가 아직은 팽배하다.
야 3당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합법적으로 의사진행을 막는 한 당분간 테러방지법안 통과는 어렵다. 하지만 4.13 총선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여야 합의대로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구획정안을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하려면 필리버스터가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국내외적으로 테러위협이 증가하고, 북한의 무력도발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국가의 존위와 관계된 대테러 정책을 국가안보를 전담하고 있는 국정원을 두고 타 기관에 부여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다. 야당도 이를 인정하고 테러방지법 제정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더민주당은 “테러방지법에서 그런 핵심내용을 삭제하고 국정원에 대한 실효적 견제 장치가 마련되면 테러방지법이 부족하더라도 통과시켜주겠다는 입장”이라며 한발짝 물러섰다.
정부여당은 야권과 국민들의 우려를 흘려듣지 말고 ‘테러방지법’이 악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국정원에 대한 실효적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여야가 각자의 입장만 고집할 게 아니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에서 타협점을 찾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약자를 위한 정치에는 여야도 없고 보수, 진보도 없다. 어떻게 하면 화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할 수 있는지, 오직 국민을 위해서만 생각하자” 장장 10시간 18분에 걸친 발언을 통해 테러방지법 처리의 부당성을 알렸던 더민주당 은수미 의원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한위클리 / B&Y】
아 은수미 의원... 저는 우리나라 국회회원 중에도 저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분이 있었나, 깜짝 놀랬고, 동시에 박근혜 대통령님께서 '국민이 테러로 죽게 생겼는데 필리버스터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라며 책상을 두들기는 장면이 겹쳐졌습니다. 참 절묘하게 대비되는 장면입니다.
10시간 동안 조곤조곤 보통사람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전달하던 은수미 의원이 허리에 손을 얹고 왜 테러방지법이 악법 중의 악법인지를 설명하며 "아이고 참내, 아이고...참" 그러며 눈물을 흘렸는데요, 쓰리고 슬펐지만 엑스터시 같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가슴 깊게 타고 들어온 이심전심때문이었겠죠. 은 의원의 '함께사는 세상'에 대한 호소력은 참 대단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10분간의 '소원'이야말로 소리없는 스트릿 피풀들의 가슴에 쌓인 응어리였을 겁니다. 양심의 마스터베이션을 즐기며 반동의 역사를 꿈꾸는 정치인들에게도 큰 울림이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하 헛된 꿈이겠죠? 서울역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 달라고 조르는 노인네의 꿈 만큼이나.
저는 이번 필리버스터 행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우리나라가 그렇게 쪽팔리는 나라만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 그리고 저마다 전공분야의 식견들을 가지고 나와서 감춰진 것들을 들춰내며 조목조목 따지는 걸 보면서 '아직 우리에게 선비정신이 살아 있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구요.
비록 인터넷상 조사라고는 하나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필리버스터가 잘하는 것이다'라고 한 사람들이 85%나 나온 것을 보면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