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로프스크 재판 : 역사적 의미와 현대의 도전’
지난 9월 6-7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하바로프스크 재판 : 역사적 의미와 현대의 도전’ 이란 주제로 대규모 국제학술대회가 진행되었다. 나는 학술회의 공동 주최자 중에 일원인 러시아역사학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측 발표자로 행사에 참가했다.
행사는 러시아연방정부와 극동지역 지방정부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러시아국영 통신사 리아 노보스티 등 언론사, 러시아 기업과 기관들의 후원으로 매우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행사 개회식에는 푸틴대통령이 기념사를 보내왔고 알렉산드르 코즐로프 북극 극동개발부 장관, 발레리 팔코프 과학 고등교육부 장관 등 연방정부 장관급인사 10여명이 그리고 미하일 덱쨔료프 하바로프스크 임시 주지사 등 극동지역 고위정부인사들도 대거 참여했다. 코로나19 상황임에도 세계 각지(중국, 이스라엘, 인도, 몽골, 한국 등)와 러시아 전역에서 역사학, 국제관계학, 국제법학, 교육학 등 여러 분야 전문 학자들이 약 200여명 참석해 세션 별로 진지한 발표와 열띤 토론들이 이어졌다.
6일 진행된 행사개회식에서 푸틴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하바로프스크 재판에 대한 논의는 이런 역사적 과오가 되풀이 않게 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며 행사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세르게이 나르쉬킨 러시아역사학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일본이 2차 대전 당시에 소련을 상대로 박테리아 생물학무기를 이용한 전쟁을 준비했었다”고 밝히며 이제라도 일본정부가 당시 전쟁범죄 사실에 대한 인정과 책임자 규명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연방 현직 검찰총장 이고르 크라스노프의 발표문도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제라도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국제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국제사회에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알렉산드르 에뱌킨쩨프 러시아과학아데미 국가와 법 연구소 부소장은 역사학자와 법학자들이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진실을 밝히고 일본의 개인과 국가에 도덕적, 법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동조했다.
개회식에 이어진 세션 별 학술회의에서 발표자들은 하나 같이 731부대를 중심으로 진행된 일본의 악랄한 생체실험과 생물학무기 연구개발을 집중 조명하며 일본이 생물학무기 개발과 731부대 생체실험에 대한 진실규명에 나설 것과 도덕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러 학자들은 일본이 역사를 바르게 평가하고 후손에게 제대로 교육하지 않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일본학교 교과서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점령지에 대한 폭력적 지배와 착취에 대해서 적혀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일본의 잘못된 교육정책으로 일본인들 사이에는 일본이 침략자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의 피해자라고까지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독일언론들이 독일 나치시대의 잘못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파헤치며 기사화해 사회적인 경종(警鐘)을 울리고 있다며 이에 반해서 일본언론들은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전혀 살피지도 기사화하지도 않고 있다고 일본 언론의 태도를 비판했다. 이러한 일본 교육과 언론의 잘못들이 지금에 이르러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연구자는 731부대의 악명 높은 생체실험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특정 국가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이 걸린 인류사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 강조하며 이제라도 일본은 731부대의 진실을 공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다른 학자는 2차대전 이후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국으로 받아들인 미국의 결정에 의해서 일본의 많은 전쟁범죄가 그냥 묻혀졌고 전쟁범죄의 가장 큰 가해자인 일본천황도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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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에 참석한 여러 학자들은 러시아 기밀문서 해제와 함께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 범죄사실들이 새롭게 계속 드러나고 있다. 라고 강조하며, 하바로프스크 재판 기념 학술회의를 정례화 할 것, 그리고 2차 대전 기밀문서들이 더 많이 해제되어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러시아정부와 주최측에 요청하기도 했다.
행사장에선 러시아 국방부, 외무부, 각종 정보기관에서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이 확보한 각종 기밀자료와 일본의 생물학무기 개발 자료들이 공개 전시되어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나는 이러한 자료들이 한국과 한국학자들에게도 유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우선 사진 찍어서 보관했다.
행사에는 다수의 러시아학자들이 앞 다투어 극동에 대한 러시아의 연고권(緣故權)을 강조하고 일본의 2차 대전 당시 전쟁범죄를 비판에 나섰다. 러시아 교육학자들은 러시아 교과서에도 일본의 전쟁범죄 기록이 실려있지 않음을 지적하며 이제라도 러시아 교과서에 일본의 침략행위와 전쟁범죄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러시아 학생들에게 교육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행사규모가 매우 컸고 참석자들의 면면도 단순한 국제학술대회로 보기가 어려웠다. 행사는 러시아가 정부 차원에서 주도하다시피 한 대규모 정책 포럼 형식으로 치러졌다. 다소 갑작스럽게 러시아정부가 보관 중이던 일본의 생물학무기 관련자료들을 대거 공개한 점, 그리고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줄줄이 발표에 나서서 일본에 대한 전쟁범죄 사실인정과 도덕적, 법적 책임을 묻는 발언들을 계속한 점들은 일반적이지 않게 보여졌다. 나는 이러한 정황들을 미루어 볼 때 아베 수상 사임 이후 근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러일관계에서 러시아가 역사문제를 제기해 일본에 대한 외교적, 정치적 압박을 가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짐작했다.
일반적으로 세계는 핵무기 관련해서는 경각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반면에 어떤 면에선핵무기 보다 오히려 인류에게 훨씬 더 치명적 위협일 수 있는 생물학무기에 대해선 아직까지 비교적 관심을 덜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러시아가 대규모 학술회의를 개최해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생물학무기 개발과 전쟁 범죄를 집중 조명했다. 세계에 생물학무기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경각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 것은 매우 의미가 큰 것으로 판단한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이런 중요한 국제행사에 한국측 개회식 참석자는 나 혼자였다는 사실이다. 이번 개회식 행사에 한국대사관이나 영사관 직원들 그리고 한국측 학자들은 아무도 참석자가 없었다. 코로나 상황 등 여러가지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수 있으리라고 짐작되었다. 하지만 바로 내 옆 좌석엔 하바로프스크주재 중국 총영사관 총영사와 영사가 함께 앉아있었고, 중국학자들의 발표들도 이어져 왠지 다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글 김원일 (모스크바대 정치학 박사)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원일의 모스크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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