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처럼 높고 높은 어버이 은혜, 살아계실 때 섬기기를 다하여라’
정철(1536-1593)의 훈민가(訓民歌)는 부모님의 숭고함을 잊지 말고 공경하라는 가르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버이’라는 표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자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사태는 실망을 넘어 분노, 아니 참담함을 자아내게 한다.
숭고한 이름의 어버이, 어느 날인가부터 대한민국의 어버이들이 전혀 숭고하지 못한 일들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 영화 속 ‘괴물'들이 저지르는 상황에 버금가는 일들을 저질러 나갔다.
사자가 된 전직 대통령을 관에서 불러내는 퍼포먼스, 부관참시라 불리는 만행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자장면을 시켜먹으며 조롱하는 행위
화형식과 삭발식을 거행하고 계란을 투척하고 온갖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두려움도 거침도 없었다.
시민들은 두려워했고 언론은 눈감았으며 공권력은 무력했다. 자본과 권력의 탐욕이 빚어낸, ‘어버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런 일을 자행해온 어버이들 대부분이 죽음을 무릎쓰고 사선을 넘어와 대한민국에 정착한 탈북노인들, 그동안 힘들게 살아온 희생에 대한 어떤 보상이나 혜택도 받지 못했던 사회 소외계층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들은 뒤로 숨은 채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하는 자들, 단돈 2만 원에 그들의 빈곤한 영혼마저 팔게 한 또 다른 괴물들의 이면이 더욱 추악하다.
1960년, 이승만 정권 몰락의 시초가 된 4.18 고대생 습격사건을 주도한 대한반공청년단, 이들은 자유당 정권의 비호 아래 친위대를 자처했던 정치깡패였다.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행사에 폭력배들이 난입해 당원·국회의원·기자 등을 무차별 폭행한 용팔이 사건, 그들의 배후에는 늘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검은 거래가 있었다.
어버이연합의 탄생과 활동 배경을 보면 우리 사회가 정치깡패 시대로 퇴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검찰은 강력한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몇몇 언론을 제외하면 보수 언론들은 아예 사실 보도를 하는 것조차 인색하다.
책임자인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아예 잠적 상태다. 수억 원의 돈을 지원했다는 전경련과 청와대도 발뺌하거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추선회 사무총장의 잠적, 전경련의 침묵,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충분한데도 검찰의 대응은 느긋하기만 하다.
적당히 또 어물쩍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여론을 호도하고 법의 근간을 흔든 이번 사태는, 닉슨정권 사임의 단초가 된 워터게이트 사건보다 더한 헌정 유린 사건이다.
다시는 이러한 범죄가 싹트지 못하도록, 정치·자본 권력을 이용해 친위대를 만든 정권과 전경련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 반드시 발본색원해야만 한다.
숭고한 ‘어버이’이라는 이름을 더럽힌 것만으로도 이 땅의 어버이들에 대한, 우리사회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모욕이자 죄악이다.
[한위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