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사이드의 보스니아 신부 (Bosnian Bride in Bayside)
뉴스로=한태격 칼럼니스트
남미 Bolivia에서 서남아시아 히말라야 산맥 속 Bhutan에 이르기까지 먼나라 세상만사(世上萬事)를 독자 여러분들께 지난 십여년간 전하려 노력하여왔던 필자이지만 가끔은 한인밀집지역 Flushing이나 사무실이 있는 Bayside 그리고 딸아이가 Boston으로 떠나기 전까지 십 수년 살았던 Great Neck 이야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삼십개 성상(星霜)을 살다보니 이젠 그만 이곳이 고향(故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이웃에 누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막연히, 우리보다 먼저 온 Columbus의 후예 Italian이나 우리 바로 직전에 주로 ‘상선(商船)에서 뛰어 내린’ 이제는 자리잡은 Greek들이 살고 있고 최근들어 Chinese들이 좋은 학군(學群) 찾아 이곳으로 밀치고 들어오고 있다는 것 정도이외에는 세상사에 ‘밝고 호기심(好奇心) 많은’ 풍향계라도 알고 있지 못하다.
위에 거론한 Town들은 Long Island라는 섬에 있는 지명들이다. Long Island는 말그대로 우리 말로 “긴 섬” 한자로 쓰면 “長島”이다. 길은 그 섬의 초입에서 거의 끝나는 Suffolk County까지 동서로 가로 지르는 길 이름은 Northern Blvd.다. 중국인들은 北方路라고 하던가? 물론 이 길이 우리 동네를 관통(貫通)한다. 이 길은 이 타운의 젖줄이다. 이 길을 가로 지르는 중요도로가 Flushing에서부터 Main Street, Union Street, Parsons Blvd., Utopia Parkway, Francis Lewis Blvd., Bell Blvd., Douglas Parkway, Little Neck Parkway 그리고 Great Neck에선 Middle Neck Road가 된다. 사무실이 있는 Bayside의 Bell Blvd.를 가로지르는 큰 도로는 주택가 안 Shopping Mall 옆 26th Avenue에서부터 32nd Avenue, 상가가 시작되는 35th Avenue, 그리고 39th Avenue가 바둑판처럼 Francis Lewis Blvd.와 연결되어 있다.
‘방콕’을 하지 않는 한, 이 타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이용하여야 하는 길이다. 32nd Avenue 선상에 필자가 즐겨 찾는, 한국여인을 Girl Friend로 둔 Greek이 운영하는 Omega Coffee Shop이 있다. 주택가 한 가운데, 버스가 다니기엔 협소(狹小)한 길에 접해 있다. 토요일 그 Coffee Shop으로 가던 길이었다. 한 이층 벽돌집 현관에는 수십 명의 남정네들이 운집해 있었고 주택가에서는 보기 힘든 보통 자동차 길이의 세 배나 되어보이는 하얀Limousine 한 대가 대기하여 있었고 그 호화차량에는 젊은 여성들이 꽃을 부착하고 있었다.
순간 필자가 지금은 독일 제2의 은행이된 Commerzbank에서 금융연수(金融硏修)를 마치고 그리스(Greece)를 포함 서(西)유럽국가들을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가 결혼식을 거행했던 장면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갔다. 당시만 해도 신랑, 신부가 탈 차량에 꽃으로 장식했던 때가 아니었는데…. 각설하고… 고객과 약속은 되어 있었지만, 돈도 벌리지 않는 부업(副業)인 Journalist로서의 취재본능은 막을 길 없는 것.
결혼식과 관련된 행사가 틀림없었다. 많은 하객(賀客)들이 신랑 신부가 식장으로 타고 갈 Limousine 앞까지 도열해 있었다. 한 카메라맨은 하늘로 말로만 듣던 Drone을 날리고 있었다. 다행히 말을 받아 준 중년(中年)은 신랑의 손위동서(同婿)될 사람이었다. 그들의 용모(容貌)가 서양인들로 보여 필자가 ‘꽉 잡고’ 있는 Astoria에 생업을 갖고 있는 Greek인 줄 알았다. 필자 신분을 밝히며 묻었더니 “우리는 Bosnia* 출신들이다!” “결혼식은 모슬렘 식이다!” 세상사에 밝다고 자부(自負)하며 살아 왔으나 이 두 단어 앞에선 그만 Blackout(정전停電)되어 버리고 말았다.
신랑 신부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자리를 떴다.
여기서 신랑 신부가 태어난 Bosnia의 최근대사(最近代史), 불과 4반세기도 안된 1990년대 내전(內戰)으로 얼룩졌던 아픈 역사를 김일성의 형제국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란 유고슬라비아가 8개 나라로 쪼개져 분열된 사건을 말한다.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뒤부터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되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유고슬라비아는 집단 지도 체제로 바뀌어 각 공화국에서 차례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1989년 공산주의 정권들의 도미노 붕괴를 계기로 본격적인 분리 독립 운동의 막이 오른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독립 무효를 선언, 6월 28일 슬로베니아에 연방군을 진격시킴으로써 유고내란이 발발하였다. 처음 3개월간은 유럽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휴전하였으나, 8월에 연방군의 크로아티아 진격으로 전투는 재개되었고, 내란은 유고 전역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1992년 1월, 크로아티아군은 전열을 정비하며 반격을 시작하였고,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로 탈출하던 가운데 남아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군에게 혹독한 보복을 당해 인권침해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992년 3월에는 보스니아까지 내란이 확대되었다. 애초에 보스니아 정부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이미 독립파(보스니아인)와 연방 잔류파(세르비아인)로 갈려 분쟁이 시작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보스니아는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연방군은 즉각 보스니아를 공격하면서 보스니아 전쟁을 일으킨다.
한편, 계속된 내란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를 피할 수 없게 되자, 1992년 4월에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함께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선언한다.
내란 말기에는 결국 나토가 개입하여 세르비아 폭격, 경제 제재 등을 동원하였고, 1995년 12월 14일 데이턴 합의서의 체결로 3년 반에 걸친 민족내란은 그 막을 내린다.
코소보는 1971년에 구 유고연방의 자치주가 되었으나, 1989년에는 공산권 붕괴로 알바니아인들의 독립요구가 커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정부는 자치권을 빼앗고, 이에 알바니아인들은 1995년 코소보해방군을 조직, 세르비아 경찰에 대한 무장저항을 시작한다.
이윽고 1998년 2월, 코소보를 순찰하던 세르비아 경찰 4명이 알바니아 민병대에 살해되면서 급기야 전쟁으로 치달았으며, 이어진 세르비아 경찰의 보복 및 진압, 이에 대한 알바니아 민병대의 저항과 보복이 거듭되었다.
1999년 초, 코소보는 전면적인 전쟁상태에 빠졌으며, 평화를 위해 개입한 서방 6나라(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가 평화안 (1.휴전 후 3년 뒤에 독립 논의/2.코소보에 나토 평화유지군 주둔)을 내놓는다. 그러나 알바니아계는 독립시기 문제로, 세르비아는 주권문제로 거부한다.
이에 미국은 1999년 3월 24일 나토군에게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와 코소보의 세르비아군 기지에 대대적인 공습을 지시, 결국 6월 9일 세르비아의 평화안 수용으로 79일간의 전쟁이 정리되었다. 이후 구 유고연방은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로 쪼개졌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2006년 6월 각각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으며, 2008년에는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코소보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분쟁(紛爭)과 갈등(葛藤)은 무지(無知)에서 시작된다. 이웃을 알면 가까워 지는 법. 알고 이해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오늘은 우리동네 Bayside에 거주하고 있는 모슬렘인 Bosnian Bride를 통해 구(舊) 유고슬라비아를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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