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18회] ‘이승만 폭정에 대한 경고’…독재가 죽인 신문, 혁명이 살려내
▲ 폐간 조치 알리는 벽보. 1959년 4월30일 서울 소공동 경향신문 사옥 벽보판에 붙은 정부의 폐간 조치를 알리는 벽보를 시민들이 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정유년 입춘인 2월4일은 사월혁명의 기상나팔이 울린 날이다. 1959년 기해년 입춘 다음날인 2월4일자 경향신문 칼럼 ‘여적’은 자유당 독재가 민중봉기로 붕괴될 개연성이 있다는 참언(讖言)을 다뤘다.
허멘스 교수(Ferdinand A. Hermens, 1906~1998, 미국 노트르담대)의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를 소개한 이 명칼럼의 요지는 아무리 다수당이라도 폭정을 자행하면 국민이 선거를 통해 소수로 전락시켜 버린다는 경고였다. 만약 어떤 악조건 때문에 선거로 폭정을 중단시킬 수 없으면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 결정”이 대신하는데, 그게 혁명이라고 ‘여적’은 썼다. ‘폭력’이란 무력이 아니라 민중 다수의 참여를 상징한다.
경향신문 ‘폐간’ 막은 고법
칼럼 ‘여적’은 무기명으로 초대주필 정지용 이래 통상 주필들이 맡았지만 논설위원들도 자주 썼다. 문제의 글은 마침 이관구 주필이 국제언론인협회 참석차 미국 출장 중이라 비상임 논설위원이던 민주당 소속 주요한(朱耀翰, 1900~1979·사진) 국회의원이 썼다. 그는 이 칼럼이 “국민의 다수 의사가 선거로 결정될 수 없을 때는 폭력이 또 하나의 다수의사 결정방법이라고 경고 삼아 쓴 것”임을 분명히 했다. “vox populi vox dei(백성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라는 뜻으로, 만약 이승만이 물러나지 않으면 시위가 점점 커진다고 경고했다(주요한 ‘경고삼아 쓴 것이 예언처럼’, 경향, 1972년 4월26일).
지금의 촛불혁명과 박근혜 정권도 같은 이치다.
경향신문 폐간 이유는 “국가의 안전과 보다 참된 언론계의 발전을 위하여 부득이 경향신문을 법령 제88호에 의거, 단기 4292년 4월30일자로 그 발행허가를 취소하는 바이다”라고 했다. 김병로 전 대법원장(재임 1948~1957)은 “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한 것은 언론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에도 위배된 것으로서 당국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논평했다. 신문사 측은 변호인단(정구영, 김동현, 이대희, 김흥한)을 구성해 제소했고, 서울고등법원은 특별1부(부장판사 홍일원, 배석판사 김정규·최보현)에 이 사건을 배정했다. 이기붕 국회의장이 홍진기 법무장관을 통하여 압력을 가하는 등 온갖 위협이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6월26일 오후 3시,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독재가 죽인 신문을 법원이 살려낸 것이다.
홍일원 부장판사는 “목숨 내놓고 독립운동하는 기분으로 정부 패소 결정을 내렸다”고 후일담에서 토로했다. 경향신문에 잘못이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었기에 “큰 목소리를 내던 자유당 강경파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그는 결정기일도 자유당 전당대회 예정일인 6월30일 직전으로 잡았다. “법관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법부 독립은 누가 주는 게 아니에요. 누가 봐도 백인 걸 흑이라고 하면 됩니까. 권위는 그 다음에 저절로 옵니다”(경향신문 1993년 10월6일).
신문 ‘정간’에 협조한 대법원
경향신문은 윤전기를 멈춘 지 57일 만에 재가동됐으나 바로 다시 세워야 했다.
6월26일 오후 6시, 예정에 없던 국무회의는 법원의 가처분 결정은 폐간조치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일 뿐 행정처분이 위법은 아님을 인정한 것으로 법원 의견을 존중하여 “발행허가 취소”를 “발행허가 정지”로 바꾸기로 결의했다. 재판은 다시 서울고법 특별2부(재판장 김치걸 부장판사, 배석 김윤행·최윤권 판사)에 배정됐고, 예상대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결론과 함께 판결 이유는 소송 당사자에게 문서로 송달한다며 1분도 안 걸려 재판은 끝났다. 이승만은 1958년 법관 연임법을 제정해 2년에 걸쳐 안윤출(서민호 의원 석방), 유병진(진보당 사건 1심에서 조봉암에 징역 5년 선고) 등 연임 대상자의 4분의 1인 20여명을 탈락시켜 시법부의 독립성을 위협했다(한홍구 <사법부>, 돌베개).
경향신문이 상고했을 당시 대법원 구성을 보면 조용순 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3분의 2가 후일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이들이었다. 3개월이 지난 뒤에야 대법관 9명 전원으로 구성되는 대법원 연합부로 넘기더니 군정법령 제88호의 위헌 여부를 가리고자 헌법위원회에 제청(1960년 2월5일)했다.
헌법위원회는 부통령이 위원장, 대법원장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5명, 민의원 의원 3명, 참의원 의원 2명 총 11명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참의원이 없었기에 “존재하지도 않는 헌법위원회에 위헌 심사를 제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꼼수였다”(한승헌 <재판으로 본 한국 현대사>, 창비). 법원의 제청을 받으면 20일 이내 위원회를 열도록 규정(제16조)하고 있기에 2월26일까지는 열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3월12일에야 위원을 임명한 뒤 첫 헌법위원회(3월23일)를 열어 없는 참의원 대신 민의원 2명을 추가 선정키로 했다.
표변한 대법원과 ‘복간’
역사는 격변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헌법위원장 장면 부통령이 사직(25일)했고, 사월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4월20일, 대법관들은 정례 회합일이 아닌데도 시국 간담을 열자 경향신문 주심 감갑수 대법관이 “대법원에서 우선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사건만이라도 처리하자”고 제의, “정부의 정간처분 효력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당장 고지하자는 걸 헌법위원회 위헌심사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판결할 수 없다고 우기던 조용순 대법원장이 “한 일주일쯤 지나서(4월26일) 하자”고 제동을 걸어 이승만 하야 성명(오전 10시) 이후(오후 2시50분)로 미뤄진 것이다(<경향신문 50년사>).
홀연히 3년간 진척 없는 제18대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이 상기된다. 탄핵 뒤에 판결이 내려지려나.
4월26일 오후 서울고법과 지법 판사들은 “정치정세가 바뀌자 종래 태도를 바꿔 돌연히 표변한 것은 종래 법관이 법대로 판결이나 결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뚜렷한 증거라며 분개”하여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에게 사퇴 권고를 결의했지만 사법부 공백 우려를 구실로 주춤하다가 5월11일 대한변호사협회의 요구로 사퇴했다.
4월27일 복간한 경향신문은 사설 ‘반독재 혁명은 개가를 올리다!’에서 “일제 당시 친일 매족에 광분하다가 해방 직후 갑자기 변장된 애국자가 범람하고 또 그들이 정계 기타 추요(樞要)한 자리에 침투하였음이 오늘의 비극을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명기하여 또다시 이러한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급조 민주투사를 엄중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완수해야 할 민주과업 중 가장 현실적인 중요한 경계점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것으로 역사는 끝났을까? 아니다. 시민정신이 남아있다. 충남 공주의 정우택씨가 5월18일 대법원을 직무유기라고 고발했지만 서울지검(담당 김동호 검사)은 불기소 처분했다. 이에 정우택은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을 냈고 고법 형사1부(재판장 윤병칠, 배석 김택현·최재형 판사)는 대법원이 4·19 후에야 회의도 열지 않고 전화로 합의를 결정, 가처분 결정문도 사후에 서명한 사실을 밝혀냈다.
고법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재판에 회부하라는 결정(준기소명령)이 나오기 하루 전날(11월7일), 대법관들은 경악했다. 불공정 재판을 구실로 판사 3명에 대한 기피신청을 내자 윤 판사는 이튿날 스스로 손을 떼겠다며 ‘회피’했고, 그 사건은 형사2부(재판장 조창섭)로 재배정되었는데, 3시간 만에 “재정신청은 이유가 없다”고 기각결정이 났다. 윤 부장판사는 대구로 전보, 5·16 뒤에는 보복성 짙은 곤욕까지 치르고서 사직했다.
▲ 경향신문 1959. 2. 4 여적 ⓒ 경향신문 보관 자료 |
<꼬리기사>
여적(餘摘) 1959. 2. 4
“…어제는 다수당을 지지하여 그에게 권력을 준 투표자도 내일은 그것을 버리고 그를 소수자로 전락시킬지도 모르며, 당파에 속하지 않는 투표자도 만일 부정행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재빨리 다수당을 소수당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처럼 투표자가 자유로이 자기 의사를 행사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 인민이 성숙되지 못하고 또 그 미성숙 사태를 이용하여 가장된 다수가 출현된다면 그것은 두말없이 ‘폭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 다시 말하면 가장된 다수의 폭정은 실상인 즉 틀림없는 ‘소수의 폭정’이라고 단정할 것이 아닌가. (…)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 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적으로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 결정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의 원칙인 것이니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 있지 않을까.” (*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