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이계선 칼럼니스트
“내 친구가 아는 파킨슨환자는 혼자서 산길을 걷다가 죽었대요. 넘어지면서 심장마비가 왔는데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구호를 받지 못하고 죽었답니다. 당신, 사람 없는 곳으로는 절대로 걷지 말아요. 걷다가 무슨 일 일어나면 얼른 911 긴급전화를 걸어야 해요.”
“오늘은 오전 내내 집에 있을 테니 걸을 일도 넘어질 일도 911 전화할 일도 절대 없을거요. 내 걱정 말고 YMCA에 가서 수영이나 잘하고 오시오.”
집에 있겠다는 말에 안심이 됐는지 아내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집을 나섰다. 그런데 나는 한시간도 안돼 911을 불러야했다. 집안에서 어정대다가 선반모서리에 머리를 박치기 당한 것이다. 식탁모서리 찬장모서리 책장모서리 우리집은 모서리 투성이다. 심심하면 부딛쳤지만 본능적으로 잘 피하여 상처는 없었다. 그런데 파킨슨병으로 몸이 무겁고 본능이 마비되어 김일 박치기처럼 충격이 컸다. 머리가 뜨끔하더니 피가 솟구쳐 흘렀다. 얼떨결에 손가락을 넣어보니 쑥 들어간다. 바닥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자 겁이나서 그런지 의식이 몽롱해지는 기분이다. 페이퍼 타울로 꾹꾹 누르면서 911을 불렀다. 생전 처음 걸어보는 911전화.
5분도 안 돼 앵앵거리면서 앰브란스가 달려왔다. 의사 간호원 경찰 등 구조팀원이 8명이나 됐다. 달려들어 지혈시키고 닦아내고 붕대를 감는데 화생방훈련보다도 빠르다. 침대체어에 꽁꽁묶어 앰브란스에 태우더니 쏜살같이 병원으로 달려간다. 바보 부자(父子)의 작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팔려가는 당나귀꼴이 됐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찌나 친절한지 병원이 아니라 호텔파티에 가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완전 VIP대접이다.
앰브란스에 실려가는데 고향의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셨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인사불성(人事不省)이다. 어머니가 서둘렀다.
“아무래도 오늘밤이 안 되겠다. 너희 형제는 얼른 안중으로 가서 의원을 모시고 오너라.”
중학교 일학년인 형과 초등학교 5학년인 나는 집을 나섰다. 밤길을 달리는 안중 십오리(6Km) 길은 캄캄하고 무서웠다. 형은 막대기를 움켜쥐고 동생은 창호지로 만든 초롱불로 길을 밝히면서 달렸다. 이조시절의 내관처럼 보였지만 형제는 용감하였다.
4개면이 5일장으로 모이는 시골안중에 “이완근”이라는 무면허의원이 있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이발기술을 배우다가 군대에 나갔는데 운 좋게 의무병(醫務兵)에 뽑혔다.
“너희들중 의과대학에 다녔거나 수술이나 상처를 치료해본경험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라.”
“군의관님, 저는 의과대학은 못 다녔지만 이발기술을 배우면서 상처치료는 꽤 해봤습니다. 면도실수로 손님 목덜미에 피가 나면 옥도정기(沃度丁幾)를 발라주고 솜으로 누르면 지혈이 잘됐으니까요. 동내꼬맹이들과 장난꾸러기들에게는 알아주는 외과의사였지요.”
“하하 좋아! 하긴 인류최초의 외과의사는 이발사였지. 그래서 청색홍색으로 빙빙 돌아가는 이발관 표시는 동맥정맥을 상징하는 수술표시였어. 넌 당장 의무병이다.”
운좋게 의무병이 된 그는 3년동안 군의관을 쫒아다니면서 의술을 배웠다. 청진기진찰 주사놓기 혈압재기 응급치료 위장병 두통치료까지 알게됐다. 3년만에 제대하여 돌아와 안중의원을 차렸다. 1950년초는 완전 무의촌시절이라 쉽게 임시의사 자격증을 받을수 있었다.
순진한 시골사람들은 엉덩이에 주사한방을 꽂으면 만병통치였다. 청진기를 가슴에 대면 여자들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까무러지면서 병이 낫곤했다. 뚱뚱한 체구에 말수가 없는 완근씨는 천성이 착했다. 사람들은 완근이 완근이하고 부르다가 왕근이 “왕건이”로 불렀다. “고려태조왕건”. 사실 그 당시 의사는 왕이었다. 환자는 치료비를 내면서도 죄인처럼 굽실거렸다. 의료보험이 없던 그 시절 병은 집안을 망치는 재앙이었다. 치료비가 비쌌기 때문이다. 낮 근무시간 지나서 받는 치료는 더 비쌌다.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치료를 왕진이라 해서 바가지요금을 내야했다. 전화도 택시도 없던 시절 우리 꼬마형제는 안중 십오리길을 한걸음에 달려갔다. 새벽 1시에 자다가 일어난 의사는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아부지, 의사선생님 모시고 갈때까지 죽지마세요.’
어린아들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했던지 아버지는 멀쩡하게 나아있었다.
“어린아들들의 효성에 하늘이 고쳐주셨습니다. 치료비 안 받겠습니다.”
돌아가는 의사를 에스코트하느라 우리형제는 또 안중길을 달려야했다. 집에 오니 먼통이 트기 시작한다. 왕복 두 번이니 60리길을 밤새 달린 셈이다. 아버지는 83세에 돌아가셨다. 안중에는 지금 5개의 종합병원이 들어선 서평택 신도시가 됐다. 지금 한국은 의료선진국이다. 미국은 의료천국이다. 가난한사람은 모든게 무료다. 환자는 왕이다. 나는 지금 가마를 타고 어전을 향하는 임금처럼 여유자작이다. 그런데 고향시절이 더 아름답다. 형과함께 안중15리길을 4번이나 달렸던 그 시절이 더 행복하다.
St, Johns 병원 응급실은 만원이라 방이 없다. 응급처치를 하고 침대에 누운채 복도에서 기다렸다. 두시간이 지나자 아내와 지인들이 달려왔다. 미국병원 응급실은 입원하기는 쉬운데 퇴원하기가 어렵다. 마냥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6시간은 기본이요 24시간을 복도에서 기다릴때도 있다. 여관 방이 없어서 길바닥에서 밤을 새우는 꼴이다.
응급실(Emergency Room)은 당장 아픈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비명,가족들의 애원이 뒤엉켜 그야말로 단말마(斷末魔)의 지옥이다. 아무리 고통스런 환자도 3시간을 울부짓고 나면 잠잠해진다.기력이 쇠진하여 말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5시간을 울부짓는 여자환자가 있었다.신의 이름을 부르다가 의사를 부른다.하나님은 책임져라 의사는 고쳐내라!어찌나 발악을 해대는지 옆사람들이 힘들었다.간호원이 달려들고 의사가 와도 소용없었다.높은 책임자가 와서 엄중 꾸짖었지만 더 사나워질 뿐.
모두가 그녀를 미워했다.나도 같이 미워했다.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워할게 아니라 기도할때가 아닌가? 난 병원에 올 때마다 기다리는 불평만 했다.왜 기다리는 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의사 간호원 환자를 위하여 기도할곳이 아닌가? 눈을 감고 자는척하면서 속으로 기도했다.그녀의 아파 부르짖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그러다가 놀랍게도 내딸 은범이 목소리로 들려왔다.지금은 완쾌 단계에 와있는 은범이의 목소리로...
눈을 뜨고 환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봤다.어머니가 손을 잡고 있었다.딸은 20대 후반의 멕시코여인.키가 큰 미녀였다.눈은 빨갛게 충혈된채 분노와 저주로 미쳐 있었다.오멘 영화를 보는듯 섬찟했다.난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 줬다.차갑더니 차차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속으로 노래를 불렀다.내가 나가는 미국교회에서 축도후에 부르는 복음성가. ‘손에 손잡고’
Bind us together Lord,
Bind us together,
With cords that cannot be broken.
Bind us together, Lord, Bind us together Lord,
Bind us together with love.
-우리 서로 손에 손잡고 주님과 함께 갑시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하나가 되어서-
지쳐버렸는지 멕시코 아가씨는 잠들어 있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주머니, 따님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겠습니다.따님의 손을 꼭잡아주시고 놓지마세요.”
응급실에서 6시간만에 퇴원, 나는 지금 멀쩡하다 지난 주일에도 우리는 손에 손잡고 Bind us together를 불렀다.
‘열흘전에 만났던 멕시코아가씨는 지금 좋아졌을까? 누군가 손을 잡아줘야 할텐데’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등촌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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