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의 첫단추와 분단의 역사
Newsroh=신필영 칼럼니스트
며칠전에는 이부영(李富榮) ‘몽양(夢陽)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呂運亨先生記念事業會)’ 이사장(理事長) 님을 만나서 동북아 평화(東北亞 平和)로 시작하여 많은 얘기들을 나눌 시간을 가졌습니다. 李富榮 이사장님은 해직 언론인(解職言論人) 출신으로서 3선의원이기도 하지만 저와는 고등학교(高等學校) 동문(同門)이기도 하여 대화(對話)를 하기가 아주 편안(便安) 했습니다
제가 몽골에 가기 3일전에 7월 3-5일에 몽골의 수도 Ulaanbaatar에서 北의 이종혁(李種革 아태위원회(亞太委員會)의 일행과 南의 홍석현(洪錫炫)등과 함께 東北亞平和 問題를 위한 심포지움 기획(企劃)이 있었으나 南北의 사태(事態)가 여의치 못하여 중단(中斷) 되었다는 얘기 입니다. 북의 <이종혁> 은 그의 아버지가 장편 소설 <두만강>을 쓴 월북 작가 입니다.
몽양 여운형 기념회관 正門에서 이우재와 함께
특히 이날 <呂運亨 生家記念館> 과 夢陽에 대한 새로운 인식(認識)을 갖게 되는 귀한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양평(楊平)에 있는 <夢陽 呂運亨 生家 記念館> 에 가기로 했던 터라 李富榮 理事長의 夢陽에 대한 세상의 평가(評價_에 대하여 많은 변화(變化)가 있고, 특히나 백범(白凡) 김구(金九)와의 관계를 설명(說明)하면서 양 지도자(指導者)를 따르던 모든 이가 함께 하여 통일운동(統一運動)에 기여해야 함을 강조(强調) 했습니다
매헌(梅軒)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월진회(月進會) 이우재 회장(李祐宰 會長), 그리고 유충식 이사장(兪忠植 理事長)과 동행(同行)이었습니다. 경기도(京畿道) 楊平 남한강(南漢江)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민족(民族)의 자주독립(自主獨立)과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위하여 평생(平生)을 바친 민족(民族)의 지도자(指導者)를 만나게 됩니다.
안내원(案內員)을 따라서 夢陽의 일대기(一代記)를 비롯하여 그의 혈의(血衣)와 장례(葬禮)에 사용했던 만장(萬丈 사진)이 있었지만, 유품(遺品_들이 너무 빈약한 것으로 봐서 해방정국(解放政局)을 통하여 <夢陽>의 인식(認識)에 따른 흔적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총탄에 맞은 血衣(혈의)
夢陽(1886-1947)이 1947년 7월19일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백의사(白衣社) 소속의 <한지근>에 의해 암살(暗殺)된지 61년만인 2008년 2월21일에서야 겨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에 의하여 건국훈장(建國勳章)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추서(追敍 사진)합니다
이에 따라 2011년에 <夢陽 呂運弘生家記念館>을 개관(開館)하였으니 暗殺된지 61년만이요, 국민훈장(國民勳章)을 받고 3년만에야 세상에 다시 태어 난것입니다
夢陽이 11번이나 테러를 당하자 미군정(美軍政)에서 헌병(憲兵)을 보냈으나 거절했고 경호원(警護員)을 대동하여 조심하라는 경고(警告)에도 불구하고 그는 “혁명가(革命家)가 자기 집의 침대에서 죽는 법은 없다”면서 거절(拒絶) 했답니다
이쯤해서 美軍政이 夢陽을 <민정장관> 시킨다고 하여 우파(右派)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느데 우연인지 모르나 <民政長官> 임명장을 수여(授與)한다는 그날 暗殺을 당했다고 합니다
<夢陽과 白凡>사이를 보면 解放政局에서 金九가 임정(臨政)의 법통(法統) 주장( 主張)에 반하여 夢陽은 臨政뿐 아니라 국내(國內) 독립운동권(獨立運動圈)과도 함께 해야 한다는 主張으로 달리 했습니다. 이에 夢陽이 경교장(京橋莊)으로 설득(說得)차 갔으나 金九는 대화(對話)를 거절(拒絶)하고 오히려 수위(守衛)에게 끌려가 몸수색을 받기 까지 했답니다. 夢陽은 좌우협상(左右協商)을 일관되게 主張을 했습니다.
미국이 5년의 신탁(信託)을 주장했으나 소련이 3년으로 주장하여 신탁통치(信託統治) 3년을 놓고 찬반(贊反)이 갈렸던 역사(歷史)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나 金九와는 달리 夢陽이 찬탁(贊託)을 주장한 이유를 북방(北方)의 대륙세력(大陸勢力) 소련과 태평양(太平洋)의 해양세력(海洋勢力)의 미국(美國)이 합의(合意) 한 것인즉 일단 받아들이고 통일임시정부(統一臨時政府)를 세우자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북분단(南北分斷)을 막고자 했다는 주장입니다
金九는 반탁(反託)을 통한 즉각적(卽刻的)인 독립(獨立)을 주장 했으나 夢陽이 暗殺당한 이후에 金九는 남북협상(南北協商)을 통하여서 만이 분단(分斷)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을 합니다. 결국 金九도 ‘남북협상론(南北協商論)’을 主張하게 됩니다
金九는 ‘제정당 사회단체(諸政黨 社會團體) 연석회의’ 참석차 북으로 갑니다. 그후 백범(白凡)도 안두희(安斗熙)에 의하여 暗殺당하는 비운(悲運)을 맞게 됩니다.
조선중앙일보의 경비행기
夢陽의 스포츠 사랑
언젠가 제가 평양(平壤)에 갔을때 대동강변(大同江邊)에 있는 <쑥섬>에 남북협상(南北協商)에 참석(參席)한 대표(代表)들이 멍석을 깔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대화(對話)를 했던 자리를 유리관으로 덮어서 보호(保護)한 것을 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參席한 대표들의 이름을 세긴 기념탑을 높이 세워 있는 것을 봤습니다. 연석회의(宴席會義)에 대한 역사적(歷史的)인 현장(現場)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곳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유리덮개를 제치고 남북이 함께 하는 기회(機會)가 올것인가 기대(期待)해 봅니다
우리 한반도(韓半島)의 분단의 책임(責任)은 강대국(强大國)에만 돌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해방정국(解放政局)에서 있었던 죽이고 죽던 비운(悲運)으로부터 찾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늘날 夢陽의 평가(評價)가 새롭게 登場하는 이유 또한 歷史의 준엄(峻嚴)한 걍고(警告)로 받아들여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가 없습니다
夢陽의 記念館을 찾아 가기전에 <코엑스>에 있는 영풍서점으로 가서 여운형 평전(呂運亨評傳)을 구입하려 갔으나 품절(品切)로 구입(購入)을 못하고 컴퓨터를 통하여 구입을 했습니다. 크고 이름있는 서점(書店)에 <呂運亨 評傳>이 品切 이라는 것이 이해(理解)되지 않습니다. 과민(過敏)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夢陽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 제거(除去)의 거사(擧事)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송진우(宋鎭禹)에 의한 것으로만 그동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조선중앙일보-여운형(朝鮮中央日報-呂運亨)이 최초로 하였다는 이유(理由)로 정간(停刊)까지 당했답니다. 손기정은 여운형(呂運亨)의 아들 친구로서 몽양(夢陽)을 따랐습니다
그가 올림픽에 일본 대표(日本 代表)로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夢陽에게 상의를 했습니다. 이때 夢陽은 출전(出戰)을 하라면서 이르기를 “비록 일장기를 달고 있지만, 등에는 한반도(韓半島)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마라”라고 했답니다.
呂運亨은 스포츠를 매우 좋아 했습니다. ‘조선체육회장’ ‘권투구락부 회장’ ‘조선체육회장’도 하고 야구단(사진)을 이끌고 日本 와세다와 경기도 하였습니다
夢陽이 <朝鮮中央日報> 사장을 하면서 조선(朝鮮)과 동아(東亞)와 함께 경쟁(競爭)이 있었던듯 합니다.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自家用)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宋鎭禹)는 인력거(人力車)로 꺼덕 꺼덕, 조선중앙일보 여운형(呂運亨)은 걸어서 뚜벅 뚜벅 출근(出勤)을 했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그리고 夢陽은 신문사용(新聞社用)으로 최초로 경비행기(輕飛行機)를 구입하여 백두산(白頭山)을 탐방(探訪) 했습니다. 이때가 1935년이라고 하는데, 제가 세상(世上)에 태어난 82년전의 일입니다
夢陽 呂運亨은 동생 여운홍(呂運弘)과 함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연설(演說)을 듣고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시작하여 암살(暗殺)당할 때 까지의 운명(運命)과 민족(民族)의 지도자(指導者)로서의 행적(行跡)을 돌아보면서 해방정국(解放政局)의 첫단추가 잘 못 끼워져서 결국은 분단(分斷) 72년을 맞는 오늘 준엄(峻嚴)한 역사(歷史)의 가르침에 무겁게 가슴에 안깁니다
우이동(牛耳洞)에 안치(安置 1961.5.16)한 자리를 누군가가 개인(個人) 불하를 받아 어렵게 되자 동생 <여운홍-전 국회의원)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에게 호소(呼訴)하였다 합니다.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에서 조국통일상(祖國統一賞)을 추서(追敍) 했습니다. 1992년 세계여성대회(世界女性大會) 때 둘째 딸 여연구가 서울에 왔을때 참배(參拜)를 했고, 2002년 8.15 민족통일대회(民族統一大會)때 셋째 여원구(呂鴛九)가 조화(弔花)를 갖고 와서 參拜를 했습니다.
제가 어느 해였던가 ‘남.북.해외 8.15해방민족대축전’에 참석차 평양에 갔었을 때입니다. 행사가 끝나고 저녁에 서너명이서 평양냉면을 먹자고하여 시내 어디엔가 식당을 찾아 들어섰습니다.
우리 일행 몇 명이 둘러 앉아 있는데, 바로 옆방에 <여원구>님이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며 냉면값을 치루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만남이었습니다.
그 노안(老眼)의 가득했던 그리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반가워하며 환하게 웃었던 모습이 오늘 이렇듯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일간 우이동에 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4.19묘소에만 다니고 지나친 것에 대한 용서도 빌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夢陽, 島山과 함께 (1935년 2월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 하는 안창호선생님과 함께)
이 마지막 사진은 지금부터 72년전에 태어난 신필영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夢陽 呂運亨 선생님 !
우리는 남북분단(南北分斷) 72년을 살아 왔습니다
전쟁(戰爭)도 했습니다.
민족(民族)의 아픈 상처(傷處)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南도 北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재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지켜 나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이룩할 것입니다
2017.8.20.
서울에서 申必泳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신필영의 삶의 뜨락에서'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s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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