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18)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빌어먹을 저 쌩쌩 달리는 자동차 대신에 마차가 거리를 누비고 있다면 난 완벽하게 중세의 도시에 “뿅”하고 떨어진 기사일 것이다. 거리를 하나 사이에 두고 13세기의 구도시와 14세기의 신도시가 나뉘어 있다. 시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천년고도, 중세의 오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프라하. 역사와 전통과 시간이 찬란한 기품으로 승화되어 미학적으로 완벽한 구도(構圖)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넬라호제베스에스 프라하로 가는 길은 거리는 30여km 밖에 안 되지만 아직도 수많은 고갯길을 넘어야했다. 프라하에 사는 오미정씨가 프라하에 도착하면 연락을 달라고 하여 부지런히 고개를 넘었다. 2시 정도 도착 예정이지만 부지런히 달리면 1시면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러면 지겨운 혼밥을 안 해도 되겠다 싶었다. 1시 20분에 올드 타운 스퀘어의 얀 후스 동상 앞에서 만나자고 하고 열심히 달렸지만 결국 처음 만나는 프라하의 여인을 쌀쌀한 날씨에 40분이나 기다리게 하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광장 옆으로는 천문시계가 한참 보수공사중이다. 얀 후스 동상 앞에서 간단히 기념촬영을 하고 바로 한식당 마미로 가서 난 제육볶음 2인분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거리에는 추석연휴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았다. 프라하는 2차 대전 때에도 드레스덴으로 오인한 비행 편대가 폭탄 몇 발 잘못 떨어뜨린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온전하게 보전되어서 과거의 영화로운 시간 속에 영원히 박제(剝製)된 전설 속 도시의 신비롭고 처연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프라하를 표현하는 말은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프라하는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왠지 기대한 것 이상이 이곳에서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온다. 연인의 도시, 유럽의 보석, 전설과 역사의 도시, 모든 도시들의 어머니, 황금의 도시, 첨탑의 도시, 매혹의 도시, 악의 도시, 에로틱의 도시 등이다. 프라하는 문지방, 언덕, 불로서 숲을 태우다, 강물의 소용돌이 등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켈트족이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녀의 안내로 식사 후 바츨라프 광장으로 향했다. 우리에게 ‘촛불혁명’의 성지 광화문 광장이 있다면 체코시민들에게는 바츨라프 광장이 있다.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이 있다면 바츨라프 광장엔 바츨라프 기마상이 있다. 이곳이 바로 시민들의 힘으로 1989년 평화적으로 공산정권을 몰아낸 ‘벨벳혁명’의 진원지이다. 프라하에는 봄이 왔는데 서울과 평양에는 언제나 봄이 오려나?
광장에 들어서니 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평화의 봄기운이 내 몸에 감돈다. 소련의 탱크를 온몸으로 막아섰던 특별한 기운이 서린 곳이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체코에 자유화 물결이 일기시작하자 공산당은 개혁성향의 두부체크를 내세워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그는 서방세계와 관계개선을 통한 독자적인 경제발전을 약속했고 시민권을 대폭 보장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했다. 광장의 역사를 읽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만 명의 소련군을 주축으로 한 바르샤바 연합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로 진격했다. 바츨라프 기마상 밑에는 소련군 탱크에 맞서다 분신자살한 대학생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를 추모하는 비석이 있다. 독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본 50만 명의 시민들이 광장에 다시 모여 들었을 때 ‘프라하 봄’의 주역이었던 두부체크가 숙청(肅淸)당한 후 21년 만에 다시 시민들 앞에 섰다. 노 정치인은 눈물을 흘리며 진심어린 연설을 시작했다. 시민들도 함께 울었고 이로부터 한 달 후 벨벳혁명은 평화적으로 완성되었다.
이곳에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섰다. 3만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그는 “핵 없는 세상”을 외쳤다. 그리고 그해 9월 노르웨이의 한림원은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의 의미로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을 사용한 나라, 미국의 대통령이 핵 없는 세상을 언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 오바마대통령은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만나 핵탄두 2,200기를 1,550기로 줄이고 미사일 1,600기를 800기로 줄이는 조약에 서명했다. 안 줄인 것 보다는 났지만 눈감고 아웅한 격이었다.
미국은 장거리 미사일로부터 유럽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려 했었다. 오바마는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 방어시스템 설치를 포기하고 핵감축 협정을 얻어냈다. 미사일 방어망이 없는 유럽은 지금 더 안전하다. 성주에 사드가 없어도 되는 이유이다. 저녁 때 혼자 한식당을 찾았는데 마침 옆에서 식사를 하던 블라디미라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로는 그 때 체코는 단호하게 미사일 방어망 설치를 거부했고 미사일이 없는 지금 체코는 너무 안전하고 평화스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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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12시까지 곤한 잠을 푹 자고 일어나 슬슬 걸어서 카프카 상이 있는 곳을 먼저 찾았다. 20세기 문학의 거장 프란츠 카프카가 일생동안 프라하를 벗어나지 못하며 유혹적이며 미로(迷路)와 같은 골목길을 거닐며 작품을 썼다. GPS를 보면서 가도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길을 나는 몇 번이고 잃어버리고 다시 발걸음을 돌리곤 하였다. 그래서 프라하를 신비의 도시 마술의 도시라고 부르고 추리소설의 무대로 자주 등장하나보다.
나그네의 발걸음은 프라하성으로 향한다. 9세기에 프라하성이 만들어지면서 프라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말도 있다. 성 안에는 높은 첨탑의 비투스 성당이 있어 멀리서도 잘 보인다. 성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보안 검색을 하는데 난 순간 아찔했다. 바로 조금 전에 등산용품점에 들러 취사용 가스를 두 통이나 샀기 때문이다.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안았다. 이곳에서 프라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입구를 지나면 바로 대통령 집무실이 나온다.
정말 이 도시에서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 오미정씨로부터 내일 대사님이 점심을 초대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잠시 후에 드레스덴에서 나를 구해준 신중욱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프라하에 지금 가고 있으니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기분 좋은 발걸음은 카를교로 이어진다.
14세기에 황제 카를 4세의 지시에 의해 블타바강 위에 지어진 카를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이다. 그는 프라하의 황금시대를 연 인물이다. 이 돌다리는 더 이상 강을 건너는 다리가 아니라 그곳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느끼고 음미(吟味)하며 사랑을 나누는 곳이 되었다. 그 다리 위에 조각상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약 17세기경부터이다. 양쪽에 15개씩 30개의 조각상이 다리 위에 놓여 있어 마치 야외 전시장을 찾은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성 얀 네포무첸 석상이다. 석상 앞 부조(浮彫)는 행운을 비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 금색을 칠해 놓은 듯 반짝인다. 나도 행운을 빌며 손을 얹었다. 당시 대주교였던 그는 카를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 시절 왕비의 부도덕한 내용의 고해성사(告解聖事)를 들었다. 왕은 그를 불러 왕비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고해성사를 들은 대로 고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는 고해성사로 들은 이야기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버티다 지하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한다. 고문에 못 이겨 그가 죽자 왕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를 묶어서 강물에 던져버렸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킨 얀 네포무첸의 전설이 강물에 두둥실 떠서 흘러갈 줄 모르고 다리 위에 선 관광객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대체 왕비는 어떤 비밀을 그에게 고해성사했을까? 배고픈 건 참아도 궁금한 건 못 참는 내 발걸음은 그 자리에서 흘러가지 못하고 한참을 머물러있다. 8세기에 그가 성인으로 추대되어 무덤을 여니 왕의 고문과 회유에도 의연히 “아니”라고 외치던 혀는 아직도 핏기가 남아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블타바 강변을 따라 고딕에서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아르누보 그리고 현대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건축양식이 전시장처럼 줄서있다. 초현실적인 환상에 빠져있는 동안 어디선가 필젠맥주의 향기가 나그네를 유혹한다. 오늘은 그 유혹에 잠시 빠지련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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