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조국순례 이야기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 아가씨 상
가수 이미자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 노랫말이다. 흑산도는 내가 어릴 적부터 거문도와 함께 반드시 가 보겠다고 벼르던 섬이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랫말이 주는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어릴 적 꿈이 나이 70넘어 머리가 백발이 된 후에야 실현되는 셈이다. 섬 전체가 높은 산으로 이루어진 흑산도는 인근의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장도 가거도 만재도 태도 등 여러 부속 섬들을 거느린 흑산군도의 중심이다.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상해의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과 가깝다.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가 일찍이 흑산도의 지리적 중요성을 깨닫고 이곳에 쌓았다는 상라산성은 지금 전라남도 지정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이런 지정학정 중요성 때문에 조선 숙종 때는 흑산진을 설치해 군대가 상주하는 국방기지였다.
절해고도(絶海孤島)인지라 오래전부터 국사범의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백제시대 세 왕자가 이곳에서 유배한 것으로 전해지며 기록상으로는 1151년 고려 의종 때 산원 정수개가 무고죄로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이곳으로 유배된 것으로 나타난다. 유배자는 조선시대까지 140여 명으로 추산되는 데 이 중에는 임금의 옷을 훔치거나 스캔들을 일으킨 내시 궁녀들도 있고 뱃길에 죽는 사람도 흔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이곳에 유배되어 15년 간 살면서 바닷물고기 생태를 집대성한 ’자산어보’(慈山漁譜)를 남긴 곳이다. 자산은 흑산의 다른 이름이다. 한말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4~1907)도 이곳에서 유배생활 했다. 즉 흑산도는 유배의 섬이다.
흑산도는 멀리서 보면 산이 검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인근 홍도와 함께 즐겨 찾는다. 고기가 한창 잡힐 때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을 파시(波市)라고 한다. 황해도 연평과 전라북도 위도의 조기 파시, 거문도와 청산도의 고등어 파시, 추자도의 멸치 파시 등이다. 그러나 흑산도는 조기 파시, 고등어 파시, 멸치 파시, 삼치 파시 등 철따라 파시가 열렸다. 그만큼 어종이 풍부했다는 의미다.
오늘날의 흑산도는 그렇지 않다. 어선이 대형, 현대화된 탓도 있지만 회유성 어종이 줄어든 탓이다. 특히 조기 어장으로 흑산도의 황금기였던 60년 대부터 70년 대 초반까지는 “흑산도에는 개까지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항구에 술집과 유흥가로 흥청거리고 당시 ‘흑산도 갈매기’라 불리던 술집여자가 2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배가 한척 들어오면 한복을 빼입은 갈매기들이 몰려가 호객행위를 했다. 강제로 끌려온 여자도 많지만 섬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지금은 옛말이 되었다. 우선 조기가 잡히지 않는다. 수온의 변화로 동해안에서 잡히던 오징어가 잡히고 예부터 잡히던 홍어의 주산지가 되었다. 세월이 급변한 것이다.
나는 서울과 대전에서 추석을 지내고 열차편으로 목포에 왔다. 여객선 터미널 부근은 추석연휴 마지막 주말을 보내려는 사람들로 숙소 잡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웃돈 주고 구한 모텔에서 하룻밤 지내고 새벽 터미널에서 흑산도 배표를 끊었다. 예전에 7~8시간 걸렸다는 흑산도를 쾌속정으로 2시간에 도착했다. 흑산도로 가는 해상의 풍광은 다도해 국립공원답게 환상적이었다. 지중해 경치가 아름답다고 했는가. 조국 다도해의 수려한 풍광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많은 섬과 섬 사이에는 연도교가 설치되어 어느 섬이나 자동차들이 빈번하게 왕래한다. 옛날 초가집 굴뚝에 연기나는 그런 섬마을 경치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어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흑산도 읍동항에는 홍어경매장이 줄지어 있고 섬 아낙네들이 저마다 홍어 전복 오징어 건어물 등을 팔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섬 일주 관광버스와 택시들이 관광객을 호객하고 있다. 내가 흑산도에 온 것은 관광보다는 면암 최익현과 손암 정약전의 유배 발자취를 살피고 흑산도의 민속과 역사의 흔적을 살펴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항구를 제외한 흑산도의 핵심이라고 하는 진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두에서 불과 2킬로 거리지만 실수로 언덕길을 택해 힘들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언덕위에서 또 귀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럴 때마다 도보 배낭여행의 신비스러움을 느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이 그때그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것 같았다. 이날 할머니를 길에서 만난 것은 결과적으로 흑산도 여행의 최고행운이었다.
<계속>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b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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