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 유배지를 가다
2차 조국순례 이야기-흑산도(3)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절해고도 흑산도에 25.4Km의 해안 일주도로가 개통된 것은 7년 전인 2010년 봄이다. 가파른 해안절벽을 따라 개통된 일주도로는 공사기간이 무려 30년 가까이 걸린 난공사였다. 그 전까지는 이웃마을에 가려면 해발 2백미터에서 4백미터에 이르는 상라산 칠락산 문암산 등 여러 개 가파른 산을 걸어서 넘어야 했다. 지금은 차량으로 1시간30분 정도면 해안도로를 통해 흑산도를 일주할 수 있다. 정약전과 최익현 유배지를 찾아가는 길은 급경사면에 개설된 도로로 스릴만점에 경치 또한 절경이다. ‘12굽이길‘이란 이름이 붙은 아슬아슬하기조차 한 S자 고갯길을 오르면 상라봉에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공영버스는 S자 길을 묘기를 부리듯 달려간다. 해안도로 오른쪽 바다 건너에는 소장도 대장도 등 흑산도 부속 섬들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리의 유배 문화공원으로 향하는 한다령에는 일주도로 준공을 기념하는 천사상이 두 날개를 활짝 펼친 체 세워져 있다. 신안군 내 섬이 모두 1004개라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따라서 신안군의 모든 섬들이 “천사의 섬”이라는 별명을 공유한다. 해안의 촛대바위는 기묘한 형상으로 바위사이에 솟은 바위가 마치 촛대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밀려온 파도가 촛대바위에 부딪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이밖에 구멍바위라고도 하는 코끼리 바위는 수면에 바윗돌로 만들어진 대문처럼 보인다.
정약전의 복성제
1801년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한다는 구실로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는 당파싸움에서 비롯된 피바람이었다. 천주교에 관용정책을 펴던 정조가 1800년 8월 사망하자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대왕대비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행사했다. 정순왕후 오라버니 김귀주는 1786년 죽었지만 벽파의 거두였다. 이 기회에 정권을 잡은 벽파가 정순왕후를 꼬드겨 오랜 정적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천주교 탄압을 내세운 것이다. 시파 남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발명하는 등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벽파가 노리던 주요 제거대상이었다. 신유박해는 전국적으로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감시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시행으로 수천 명 신자가 붙잡히고 3백 명 넘는 사람이 순교했다. 정약용 집안은 남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이복형 정약현과 이복동생 정약횡만 박해를 면했고 형 정약종은 장남 정철상과 후처 유소사 및 후처소생 정하상 정정혜 등 일가족 모두 신유박해와 훗날 기해박해 때 차례로 순교했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함께 처형을 면하고 유배길에 올랐다.
정약전이 세운 서둔서당. 현판 글씨는 동생 정약용이 썼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동안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그의 대부분의 학문적인 업적이 이루어졌다.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 역시 바다물고기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그는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이 음침하고 어둡다며 역시 검다는 의미의 자(玆)를 사용해 책이름을 자산어보라 했으며 가족에게 편지보낼 때도 흑산 대신 자산이라고 했다. 3권 1책으로 된 자산어보는 제1권 인류(鱗類) 20항목, 제2권 무인류(無鱗類) 19항목, 개류(介類) 12항목, 제3권 잡류(雜類) 4항목 모두 55항목로 짜여진 19세기 대표적인 어류서적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교훈적으로 기술했다. "들쥐가 전복을 엿보아 엎드려 있다가 전복의 꼬리로부터 등으로 오르는데, 이때 전복은 쥐를 업고 도주한다. 조수가 밀려오면 쥐는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이것은 사람을 해치려는 도적에게 하나의 귀감이 될 것이다" "두 날개에는 가는 가시가 있어서 암놈과 교미할 때에는 그 가시를 박고 교합한다. 암놈이 낚시바늘을 물고 엎드릴 적에 수놈이 이에 붙어서 교합하다가 낚시를 끌어올리면 나란히 올라오는데, 이때 암놈은 먹이 때문에 죽고, 수컷은 간음 때문에 죽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음(淫)을 탐내는 자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전복을 먹으려던 들쥐는 전복의 계책에 속아 죽고 여색을 탐닉하던 홍어는 도망치지 못해 죽는다. 정약전은 전복을 먹으려는 들쥐를 도적에 색을 탐닉하던 홍어를 색광에 비유해 윤리적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정약전은 우이도 주민 문순득의 표류기를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유구 및 여송 표류기`라는 부제의 책은 문순득과 함께 표류한 우이도 주민 6명이 1801년 12월에서 1805년 1월 8일까지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 등지를 돌면서 4년간 겪은 각국의 풍속을 자세하게 기록한 귀중한 자료이다. 정약전이 유배된 흑산도 사리 마을 원래 이름은 ‘모래미‘로 ’모래무지’의 전라도 방언이다. 향토사학자 임종인 선생은 일제시대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을 억지로 한문으로 바꾸면서 사리(沙里)가 되었다며 한탄했다. 이 같은 현상은 흑산도만 아니다. ‘곰나루‘를 ’웅진‘(熊津)으로 바꾼 것은 차라리 애교다. 새로 건설되는 도시에도 굳이 산본(山本)이니 평촌(平村)이니 하는 왜색 지명을 붙이는 이유는 정말 모르겠다.
정약전 유배지 앞에서 바라본 바다
정약전 유배지 사리는 남쪽으로만 바다가 보이는 외진 곳이다. 1765년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흑산도에 남자 361명, 여자 343명 모두 704명이 산다고 기록했다. 이를 보면 당시 사리 마을에는 기껏 수십 명 정도 살았을 것이다. 천주교 평등사상을 익힌 44세 정약전은 어촌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그는 서당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어부들이 잡아온 고기를 관찰해 생김새와 생태를 연구했다. 장덕순이란 주민이 조수역할을 맡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동생 정약용을 무척 그리워했던 그는 동생이 사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행여 잠시라도 만날 수 있을 까 기대하고 육지와 더 가까운 우이도로 적거를 옮기려고 희망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글을 깨우쳐 주는 정약전을 놓아주지 않았다. 야반도주까지 감행했지만 주민들의 추격으로 실패한 후 동생과의 정리를 설명하며 애걸하여 1년 후 우이도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 사면은 헛소문이었다. 결국 그는 1816년 우이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약전 유배지는 현재 유배 문화공원으로 꾸며져 정약전 처소와 복성재(復性齋) 서당 등이 복원되고 흑산도로 유배된 사람의 이름과 죄명을 새긴 기록판이 있다.
천주교 때문에 귀양생활을 한 정약전이지만 현재 교회 내 평가는 엇갈린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개설한 서당 복성재(復性齋)의 의미를 “서학을 버리고 성리학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에 따라 천주교회 일부에서는 정약전이 배교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목포성당 주임신부였던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드예 신부는 1902년 6월6일 조선교주장 뮈델 주교에게 흑산도를 사목방문한 후 보낸 사목보고서를 통해 ”정약전은 흑산도에 있는 박인수네 집에서 귀양살이 했습니다. 박인수도 교우가 되었습니다. 정약전이 한국어 성가를 만들었는데 제가 그것을 받게 되면 주교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교우에 대한 평판은 존경에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정결의 모범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현재 사리 유배지에는 천주교 공소가 세워져 있으며 복원된 정약전 처소에는 공소 신자들을 돌보는 평신도 전교사 김옥희 씨가 관리하고 있다. 이날도 김옥희 씨가 나를 이곳저곳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그분은 마을사람 모두의 가까운 친구로 대부분 노인들인 주민들을 혈육처럼 보살피는 작은 마을의 천사였다. 유배지 문화공원 앞 에는 학생이 한 명도 없어 폐교상태인 사리 초등학교가 휴교 공시를 붙인 채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떻든 정약전은 배교자냐 아니냐에 대한 천주교 내 논쟁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학자이자 성실한 신앙인으로 한 시대를 살다 가신 19세기 조선의 큰 인물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쓸쓸한 한촌을 뒤로 하고 나는 최익현 선생 유배지로 발길을 옮겼다. (계속)
정약전 유배지 앞의 천주교 공소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b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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