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조국순례 이야기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흑산도를 나와 점심 무렵 목포에 도착했다. 3년 반 전 70일간 배낭여행 때 알게 되어 변함없이 교류해 온 벗님이 반갑게 맞이해주어 싱싱한 생선회를 대접받고 곧바로 시외버스편으로 여수로 출발했다. 여수로 가는 남해안 고속도로는 터널의 연속이었다. 한국은 터널공법이 발달되어 순식간에 굴을 뚫는다고 한다. 다음날은 추석연휴 마지막 날이라 여수 여객선 터미널 부근은 숙소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어렵사리 착한 가격의 게스트 하우스를 만나 노숙을 면하고 다음날 아침 배표를 구입했다. 2시간 거문도 뱃길은 다도해(多島海)답게 크고 작은 섬이 절경을 이룬다.
오전 10시 거문도에 도착해 민박집에 배낭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거문도는 고도(古島)·서도 동도 3개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면적은 12km²다. 거문도로 불리기 전에는 3개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삼도(三島)'라고 불렸다. 삼도라지만 모두 연도교로 연결되어 차량이 자유롭게 다닌다. 삼도일체가 된 것이다. 면소재지와 영국군묘지 여객선터미널은 모두 고도에 있다. 부속섬으로 삼부도와 백도가 있다. 거문도 관광의 필수코스라는 절경의 백도는 이날 관광객이 적어 결항했다. 거문도는 세 개 섬이 바다를 두고 병풍같이 둘러쳐져 있고 가운데 수심 깊은 바다가 커다란 호수처럼 형성되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천혜의 항만이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조선말기 열강들의 먹잇감이 되어 영국에 2년이나 점령당했던 것이다. 거리로 나온 나는 먼저 흑산도 여행의 최우선 목적인 영국군묘지로 향했다.
영국군묘지는 해발 110미터 화양봉 중턱에 자리 잡았지만 울릉도에서 다친 왼쪽다리가 불편해 걷기가 힘들었다. 당시 아시아대륙과 극동진출을 노린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영국함대는 1885년 3월(음력) 거문도를 무단 점령했다. 조선정부는 거문도가 점령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청나라와 러시아의 통보를 받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정부는 급히 대신을 파견해 영국함대와 접촉했다. 이에 영국해군은 외교교섭과 관계없이 거문도 기항(寄港) 대가로 연 5천 파운드를 지불하겠다고 제의했다. 이는 명분상 거문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홍콩처럼 조차계약(租借契約)을 맺어 영구 주둔하려던 속셈이었다. 조선은 일단 영토 점령 자체가 부당한 일이라며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오히려 화양봉 정상에 영국기를 게양하고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으로 명명했다.
거문도 점령을 외교적으로 해결한 것은 조선이 아닌 청나라였다. 청은 청일전쟁 전까지 극동 최대 해군력이었던 북양함대를 거문도에 파견해 정여창 제독으로 하여금 영국함대와 교섭하게 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팡질팡했다. 고종은 일본의 야욕을 러시아의 힘으로 막아보려고 1886년 7월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했다. 이에 격분한 중국의 실력자 위안스카이는 고종폐위까지 황제에 건의한 상태였다. 한편으로 청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도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반환 협상을 성의껏 진행하지 않았다. 이렇듯 청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실익을 얻으려고 시간을 끄는 사이 영국은 서도에 영구 포대까지 설치하고 당시로서는 획기적 첨단기술인 거문도와 상하이 영국조계 사이 해저케이블 통신망까지 개설했다. 조선 최초의 전화가 1898년 1월 개통된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대영제국의 막강한 국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거문도 점령이 장기화되자 영국의 조선 식민지화로 극동의 세력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열강이 앞을 다투어 거문도로 군함을 파견해 이 지역은 한 때 각국 군함 전시장처럼 변했다고 한다. 조선이 철저히 배제된 가운데 열강들 사이에 진행된 협상은 1886년 12월 타결되었다. 협상에서 청과 영국은 조선에 간섭하지 않고 러시아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상호 약속했다. 이 같은 협상으로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1887년 2월5일 함대를 철수시켰다. 영국함대의 거문도 철수 소식도 조선은 가장 늦게 전해 들었다. 외교력도 기초적인 국방력도 없는 조선의 비극이었다.
거문도 영국군 묘지
나는 화양봉 중턱 영국군 묘지공원 밴치에 앉아 당시 힘없는 나라의 설움을 생각했다. 당초 9기의 영국군 묘지는 후손들이 이장(移葬)해가고 지금은 3기만 남았다. 돌비석에는 “1886년 3월 알바트로스호 수병 2명이 불의의 폭발사고로 죽다.”고 쓰여져 있다. 윌리엄 J. 머레이와 17세 소년 수병 찰스 데일의 묘소다. 다른 나무십자가에는 "1903년 10월 3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2명은 당시 주둔하다 폭발사고로 숨진 수병들이며 한 사람은 훗날 1903년 죽은 사람이다. 영국군은 거문도에서 공식적으로 철수한 후에도 1930년까지 군함과 상선이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거문도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고 인정받은 셈이다.
가슴 아픈 사실은 거문도 현지인들의 영국인에 대한 호감이다.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던 거문도 주민들에게는 영국군은 오히려 은인이었다. 작업에 동원되면 일당을 필요한 물건으로 계산해주고 식사를 제공했으며 대영제국 해군답게 군율이 엄해 섬 여인들을 함부로 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민들에게는 통치자가 누구든 당장 먹고 살게 해주는 것이 고마운 것이다. 영국군에 대한 좋은 인상 때문인지 주민들은 한동안 섬 이름을 영국인들의 포트 해밀턴 발음을 ‘보도 해밀도’로 부르기도 했다. 사실 영국이 다른 식민지에서 한 짓을 본다면 거문도에서도 영국군이 특별히 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조정이 너무나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착취만 일삼았기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무섭다”(苛政猛於虎)라는 공자님 말씀이 딱 맞는 말일 것이다. 혹시나 또다시 그런 세상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거문도에 가기 위해 출발한 여수항에도 소녀상이 있다
<계속>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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