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성찰의 기도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고,
오늘날 저희들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충분히 즐기며,
명랑하고 참을성 있고, 친절하고 우애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유일한님의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에서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다운 인간에게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일 것입니다.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인간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타인을 타인이 아니라 이웃으로, 혹은 형제로 인식하며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영원합니다. 자기에서 시작하지만 또 다시 후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목표치에 도달하면 욕심 부리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착시현상입니다. 멀리서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강력한 욕망의 갈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인간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무심코 '우리'라는 단어를 지나쳐버리지만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는 일용할 양식과 똑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의 표상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였습니다. 우리였던 이스라엘 모두에게 똑같은 양의 만나가 분배되었습니다. 특이하게도 만나는 하루만 지나면 벌레가 나고 상해서 쌓아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양식이었던 '만나'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습니다. 물경 40년간이나 그들은 그 '만나'를 먹으며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 배우고 훈련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부에 대한 성서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금식까지 해가며 연보를 하여 기근에 처한 형제 교회를 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양식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의 문제는 당연히 첨예한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망각하는 길이었고, 상속이라는 부의 세습은 그 길의 연장이었습니다.
박해의 시기에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들의 부의 소유가 극도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 부를 소유하게 되어도 대부분의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이 극한 가난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부의 축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밀라노 칙령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곳곳의 교회들이 땅을 소유하고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역시 더 이상 재산이 몰수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 합법적으로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단단해 보였던 초기 교회 공동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교회가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된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교회 안의 신분의 격차가 다시 생기기 시작한 이때입니다.
상황을 목격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교부들은 그러한 현실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력하게 부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인 요한 크리소스톰은 부자들이 불법으로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면 죄가 없다고 하는 믿음에 반대하였습니다.(!!) 부자들의 죄는 자신들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데 있으며, 그것이 바로 강도질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부를 세습하는 상속은 도둑질을 연장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부자 교회는 가난한 교회의 교인들을 약탈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자기 교회 교인들을 가난한 교회와 나누지 않는데 있으며, 그것이 바로 강도질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강도질, 도둑질의 연장이며, 이는 개인적인 부의 세습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제가 오히려 도둑놈 취급을 받거나 시기심에 가득 찬 독불장군이라는 악명을 얻었습니다. '귀 있는 자'라는 주님이 자주 사용하셨던 어구가 새삼스럽습니다.
유일한님이 실천한 것이 바로 교부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가 사업을 하는 목적은 남달랐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병든 동포를 구하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장관이라는 높은 직책까지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마저도 마다하고 자신의 길을 고수하였습니다. 물론 정치자금 역시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이 세상을 훌훌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고, 상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입니다. 그는 매사에 공과 사가 분명했습니다. 외국을 오가는 비행기 표는 물론 모든 비용을 자신의 주식배당금에서 공제하도록 했고, 회사 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기업이 망하든 흥하든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여 착복하고, 법의 모든 허점을 이용하여 재산을 불려나가는 재벌들의 삶과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원을 주인으로 우대하였습니다. 1930년대부터 부천 소사 공장 부지에 종업원들을 위한 독신자 기숙사, 집회소, 운동장, 양어장, 수영장을 만들고, 주식을 공개하여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이야말로 사업가의 섬김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모두가 잘 사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그에게서 신실함의 대명사인 요셉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신실함은 그리스도인의 으뜸가는 덕목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을 닮아 신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그분을 닮아 가능한 최고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우리의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유일한님은 바로 그 일에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더더욱 빛났습니다. 손녀 유일링에겐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1만 달러를 주고, 딸 재라에겐 유한중·고 안의 땅 5천 평을 주면서 학생들이 뛰노는 유한동산을 꾸미라고 했습니다. 외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보냈으니 스스로 힘으로 살라며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대 재산은 모두 교육과 사회사업에 기증했습니다. 공개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말을 그를 통해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한국의 삭개오였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참된 믿음을 낳습니다. 그분의 자녀들을 통해서 우리는 상속된 믿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재산입니까? 그때라고 재산이 가치가 없었겠습니까? 그 많은 재산을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한 아들의 마음에 왜 억울하다는 마음이 안 들었겠습니까? 하지만 아들 일선은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하지 않았습니다. 1991년 타계한 딸 유재라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비롯하여 전 재산 205억원을 공익재단에 기부하고 빈 몸, 빈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고와 상식으로는 정말 미친 사람들이라는 표현 이외에는 달리 그분들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만큼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어쨌든 한국 기독교 역사에 이런 믿음을 가진 가족이 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가운에 이런 믿음을 물려받은 이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기가 어렵습니다. 록펠러처럼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기도하는 이는 많아도 유일한님처럼 부를 사용하고 상속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기업으로 알려진 거의 모든 회사들이 부정으로 얼룩지거나, 종업원들에게 가혹하다는 소문이 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도 이런 분위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아들이 회사에 남아 있다면 자신의 사후에 그로 인해 파벌이 조성되고, 그렇게 되면 공정하게 회사가 운영되기 어려울 것이라며 자신의 외아들을 회사에서 쫓아내고 조카까지 그만두게 한 그분에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떠오릅니다.
그분을 통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참된 믿음의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사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분처럼 산다면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생각은 더 고마운 일인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믿음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반응들을 보아왔습니다. 복음을 말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믿는다면서도 삶으로 실천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모순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는 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청지기라는 말을 잘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청지기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청지기로 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논쟁에 천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만 하는 그리스도인은 목사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한님이 더더욱 고맙고 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분에게는 청지기라는 말이 모순이 아닙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떨어져 살았던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숙고하는 기도의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늘 언덕 위 자신의 집에서 회사를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새삼 모든 영적인 분들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갑니다. 외로움과 고독이 감사라는 생각을 하며 그분의 기도를 드려봅니다.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고,
오늘날 저희들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충분히 즐기며,
명랑하고 참을성 있고, 친절하고 우애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