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나폴레옹’ 김경천장군 북청인물
진짜 태극기의 섬, 항일운동 성지 소안도(3)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나는 소안항에서 완도로 향하는 배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거제를 생각했다. 완도에서 거제로 가는 방법을 확인하니 배편은 없고 순천을 거쳐 진주로 가는 방법과 여러 곳을 경유(經由)해 부산으로 가는 방법이 있는데 모두 7시간 이상 걸린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호남과 영남사이의 교통편은 열악한 편이다. 승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호남 소통이 부족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쨌든 시간이 촉박해 부산행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아무래도 부산에 밤늦게 도착하면 그곳에서 숙박해야 할 것이다. 나는 7시간 걸리는 버스 안에서 조금 전 느꼈던 태극기의 섬 소안도의 감동을 반추(反芻)했다. 후일담이지만 이번 여행 후 미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찾아본 자료는 항일운동 3대 성지라는 소안도와 함경남도 북청과 부산 동래의 항일운동사다. 북청은 북한지역이라 그런지 자료가 많지 않았다. 동래는 자료가 남아 있지만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살펴본 자료에 근거해 북청과 동래의 항일운동 역사를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소안도는 내가 직접 현장에서 보고 취재한 것이지만 북청과 동래는 미국에 돌아와 자료들을 검색한 내용들이다.
어렸을 때 ‘북청 물장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북청 물장수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조선 철종 때다. 당시 세도가 안동김씨 김좌근 저택에 북청 사람 물장수 김 서방이 매일 삼청동 약수물을 배달했다고 한다. 고종 때는 북청 사람들이 대거 서울에 와서 새벽마다 소리를 지르며 물지게를 지고 약수물을 팔았다고 한다. 서울에 상수도가 생긴 때는 1909년으로 일제는 뚝섬에 정수장을 갖추어 한강물을 끌어들여 주로 일본인거주지에 공급했다. 서울시내에는 220군데 공동수도를 설치해 물장수들이 물지게를 지고 팔러 다녔다. 뚝섬 정수장과 공동수도는 나도 생각난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에 상수도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그전에는 공동수도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물장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에서 북청 물장수는 함경도 사람들의 부지런함과 자립과 개척정신을 상징했다. 일제는 지리적 조건이 좋은 함경도에 비료공장과 수력발전소 등 여러 산업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함경도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배타정신이 강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김일성도 주로 함경도를 중심으로 무장 게릴라 투쟁을 편 것으로 되어 있다.
북청 사람들은 자립하고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 일제하에서도 국산품장려와 교육운동을 펼쳤다. 북청에서는 서울의 3.1만세운동 불과 1주일 후 시위가 일어났다. 3월8일 오전 9시 천도교도들과 학생 수백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징과 북을 울리며 산으로 올라 시위를 계속했지만 일경의 저지로 해산 당했다. 이에 주민들은 조석하(趙錫河 1855~미상) 선생을 중심으로 3월10일 정오 노덕면에서 재차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를 주동한 조석하는 일경에 체포되어 5개월 옥고를 치른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독립선언은 3월1일 이전인 2월8일 동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2.8 동경 독립선언서 주동자로 북청 출신 김연준(金鍊俊1896~1923) 선생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귀국해 러시아 만주를 오가며 함경북도에서 무장 항일운동을 펼치다 러시아 적군(赤軍)에게 체포되어 1923년 순국했다.
또한 북청 출신으로는 전설적인 김경천(金擎天 1888~1942) 장군이 있다. 김경천은 대한제국시절 일본에 유학해 육군사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신식군대를 배워 일본에 저항하려는 일념이었다. 재학 중 한일병탄이 일어나자 졸업 후 일본군장교 임관을 거부하려고 했으나 독립전쟁하게 되면 일본군에서 정보를 빼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꿔 1918년 말까지 기병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3.1운동 후 육사동기생 지청천(池靑天 1888~1957)과 만주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그해 가을 연해주로 건너갔다. 러시아 혁명내전이 한창이던 당시 일본군은 대규모로 시베리아에 출병했었다. \
김경천 장군 www.ko.wikipedia.org
그는 신출귀몰한 ‘백마탄 김 장군’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로 인해 김일성이 그의 가명을 도용했다는 가짜 김일성 설의 근거로 인용된다. 1936년 소련군의 탄압으로 체포되었고 1939년 석방됐다가 다시 8년형을 받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1942년 1월 사망했다. 그 후 소련 군사법원 재심에서 사후 무죄를 선고받았고 한국정부는 그에게 1998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김광서(金光瑞)로 개명한 것이다. 그가 기록한 일기형식의 회고록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 남아있다.
북청 주민들은 거물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고장답게 개화기부터 '자강 운동'을 펼쳤으며 일찍부터 근대식 교육과 산업발전을 이루었다. 덕분에 당시 함경도를 포함한 북한지역은 '동양의 덴마크'라는 별명과 함께 함경도에 없는 것 세 가지는 머슴, 기생, 거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생활수준이 남한보다 훨씬 높았다. 또한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진출은 타 지역의 추종을 불허했다. 함경도 여자들의 악착같은 생활력은 지금까지도 ‘또순이’라는 별명으로 전설처럼 전해진다. 해방 후 북한지역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미진해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도 북청을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꼽는 것을 보면 이 지역 항일운동의 격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또 다른 항일운동의 성지 동래의 항쟁은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계속>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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