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칼럼] 헌신의 기도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이 몸과 영혼을 갈가리 찢어
당신을 위해 쓰게 하시고
제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하소서.



시몬느 베이유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참 지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짧은 이 기도에서 그녀의 오랜 고민과 경험, 그리고 헌신에의 의지와 결단이 느껴집니다.

그녀는 유대인이었고 기독교에 심취하였지만 세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그녀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따지고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례를 받지 않은 그녀에게서 그녀의 진지한 고민을 봅니다. 사실 복음은 본질적으로 매우 급진적입니다.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복음대로 산다는 것이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것으로 우회로를 만든 후에 고민 없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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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몬느 베이유 ⓒ공개자료사진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복음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시몬느 베이유 역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그런 기질은 공산주의와 관련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철학교사로서 노동자들의 좌절과 희망을 공유하였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의 조국 프랑스를 사랑하였지만 온 세계 민중의 해방을 더욱 크게 갈망하였고, 투철한 혁명가의 길을 가면서도 행동주의자가 되지 않고 신비주의 안에 머물렀습니다. 격렬한 노동운동과 반파시즘 저항운동의 한복판에서도 연민과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그런 그녀를 '현대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새삼 제 마음에 부각되는 것은 오늘날 개혁과 갱신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나운 태도가 몹시도 아쉽기 때문입니다. 개혁과 갱신은 그런 사나운 태도에서 나오는 폭력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헨리 나우엔의 책에도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평화를 볼 수 없었다고 술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평화운동이 평화를 낳거나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실천은 언제나 연민과 사랑과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사람들에 의해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박해의 대상이었고 모멸과 수치를 당했지만 사랑을 잃지 않았기에 어떠한 희생도 기꺼이 감수했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그녀는 계급과 민족, 이데올로기를 넘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 깊었습니다. 스페인은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공화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를 지키려는 인민전선과 파시스트 정권을 세우려는 프랑코 반란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 싸우는 인민전선의 공화군을 돕기 위해 당시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인민전선에 자원입대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소설가 에밀 졸라와 시인 바이런이 있었습니다. 시몬느 베이유 역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뺏고 빼앗는 싸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공화군 안에서도 노선의 차이로 다툼이 벌어지고, 프랑코를 지지하던 교회에서도 스파이로 몰린 사제들이 무자비하게 처형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농민들을 위한다는 인도주의가 명분이었지만,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살인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한 경험은 베이유에게 사회적 실천을 넘어 신비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래의 취지와 다르게 인간성이 파괴되는 전쟁을 혐오하게 되면서, 그녀는 죽임을 당할지라도 타인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려는 비폭력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부유한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았고 나라 잃은 프랑스인들과 함께 고난 속에서 연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녀는 영국에 있는 망명정부의 모리스 슈만 밑에서 일했는데, 그곳에서 프랑스 난민에게 배급되던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똑같이 나누어 먹으며 지냈습니다. 결국 병약했던 베이유는 병을 얻어 1943년 8월 24일 세른 네 살의 나이로 요양소에서 죽었고, 그녀가 쓴 책들은 그녀가 죽은 뒤에 세상에 소개되었습니다.

생전에 시몬느 베이유의 관심은 늘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향했습니다. 그녀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에 항거하며 가련한 노동자들의 벗이 되어주었습니다. 1931년 르퓌 중학교에 철학교사로 발령을 받은 베이유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일주일에 한 번씩 셍테티엔느까지 여행을 했으며, 월급을 받으면 책을 사서 노동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들도 인류가 낳은 문화적 유산을 나눠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부들과 함께 빵을 먹었고, 선술집에서 노동자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른 노동자들처럼 겨울에도 난로를 피우지 않고 지냈습니다. 지병이 있던 그녀에게는 가혹한 것이었지만 자신이 다른 노동자들보다 나은 조건에서 지내는 것은 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학교를 휴직하고 전기 공장에 들어가고, 다시 자동차 공장에서 절단공으로 일했습니다.

그녀는 공장에서 억압의 실체를 몸으로 깨달았는데 노동자의 삶은 노예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바로 그 노예의 낙인을 발견했습니다. 한 번은 병원 치료를 받고 버스에 오르면서 "도대체 나 같은 노예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이 버스를 타고 내가 가진 12수우를 쓸 수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완전한 노동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행복해 하며 그녀는 "이제 나도 추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서, 좋든 나쁘든 간에 선의와 악의를 두루 갖춘 현실 속의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녀에게서 인류와의 깊은 연대가 의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같은 연대야말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형제애'가 아닐까요, 그것은 그녀와 같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그녀는 고통 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고통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거대 담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스스로 택한 고난 속에서 베이유는 사랑의 운명에 대해 깊이 숙고했습니다. 그리고 자청한 고난이든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이든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구원을 가져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중력처럼 우리를 불행으로 끌어들이는 고난에 대항하기보다는 그것을 은혜의 도구로 사용할 것을 권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남아 있던 상처를 기억해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이유를 묻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불행으로 조각나 절규하는 영혼에게 주어지는 것은 허무뿐입니다. 베이유는 이 허무를 '영혼 전체에 넘쳐흐르는 공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음'이며, 결과적으로 '사랑 없음'입니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고난 속에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그칠 때 이 '하나님 없음'이 종착역이 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허무 속으로 들어가 사랑을 멈추지 않고, 적어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 어느 날 마침내 하나님이 그 영혼에게 다가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녀는 불의와 파괴와 무의미한 고난 속에서 정의와 장차 이루어질 해방과 십자가 이후에 드러난 사랑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사42:3) 주님의 사랑을 믿고 불행한 인생들에 대한 연민으로 진정한 연대를 이루어냈습니다. 그것을 사랑의 승리라고 말해도 될까요? 그녀의 기도에는 이미 그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제 마음에 담기를 사모하며 두렵지만 그녀의 기도를 저도 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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