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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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동성애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난 4월 2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김영주 총무)는 김조광수 감독 간담회를 열었다. 행사 시작 전부터 동성애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강연장에 자리를 잡았다. 김조광수 감독의 안전을 우려한 교회협은 장소를 바꿔 비공개로 간담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간담회가 비공개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부 기독교인들이 간담회 장소로 난입하였습니다. 그들은 통성기도로 간담회를 중단시켰습니다. 김조광수 감독 바로 앞에서 그들은 주님을 부르고 이어서 큰 소리로 방언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한 백인 할머니가 앞으로 나와 말없이 김조 감독을 안아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캐서린 크리스티라는 캐나다 연합선교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기자가 그 할머니를 취재하였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김조광수 감독을 안아 주었는지 궁금하다고 말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그날 분위기는 끔찍했다. 사람들의 기도 속에서 증오감(hatred)을 느낄 수 있었다. 김조광수 감독의 간담회 동안 우리는 그의 인생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매우 좋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 사람들이 간담회장에 들어왔다. 정신이 없어 '이 자리를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떠날 수 없었다. 김조 감독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그를 지지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다. 그는 앞으로 평생 그날의 기억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 장면의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포되었고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이단과 정통의 구분없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모습으로 일반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선거에서 '기독당'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통성 기도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목사였던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평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동성애 반대자들의 기도에서처럼 섬뜩한 증오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오늘날 한국교회의 정확한 자화상입니다.
예수를 잘 믿을수록, 교회를 열심히 다닐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할수록 더 많은 증오감을 표출하는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예수를 내세우고, 사랑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지만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거친 적대감과 무시무시한 증오감이라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런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만일 이런 분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들의 모습은 달라도 많이 달라야 합니다. 적대감과 증오가 아니라 환대와 사랑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존중과 배려, 이해와 포용이야말로 환대와 사랑의 가장 명확한 증거일 것입니다.
하지만 도무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참람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입니다.(벧후1:4)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자비가 아니라 증오와 적대감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란 히브리어 '라하밈'을 번역한 단어입니다. 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측은한 마음(긍휼)'로 번역하였습니다. 히브리어 '라하밈'의 의미는 원초적인 관계로 특히 가족 관계를 암시합니다. '라하밈'의 어근은 '레헴'인데 이는 자궁, 모태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비는 엄마가 자궁 속의 아이에게 가지는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가지는 '라하밈'은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열상3:16-28)에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의 진짜 엄마는 자기 자식을 가짜 엄마에게 주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임금님,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26)
진짜 엄마에게는 사실관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이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하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자비 '라하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 자비를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해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에 성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이 자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시는 분에 넘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는 가장 원초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원초적인 사랑인 자비를 받아 다른 모든 이들에게 이 자비를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눅18:9-14)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1-12)
세리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3)
그런 그들을 향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4)
방언으로 통성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에게 동성애자들은 추호도 틀림없이 세리와 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생각과 판단이 옳을지라도 그들의 기도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성품을 하나님의 자비로 채우는 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도에서 증오와 적대감이 표출된다면 그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자기의보다도 더 악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제자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케서린 크리스티나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도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