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3)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시장 거리를 달리다 정육점에 소꼬리가 있는 것을 보고는 로토라도 당첨된 기분으로 샀다. 우리 돈으로 만 원 정도이니 정말 로토에 당첨된 것이다. 유라시아를 달리며 꼬리곰탕을 먹을 수 있는 건 행운이었다. 이 지역은 가족단위로 휴가 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대부분의 호텔에 주방 딸린 방이 있었다. 숙소는 아파트 형식이다. 방 두 개에 주방과 응접실이 딸린 카스피해의 낙조(落照)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 우리 돈으로 3만 원 정도이다. 그것을 푹 고아서 먹으니 설날 떡국 못 먹은 보상은 충분히 된 것 같다. 여기서 하루 푹 쉬고 꼬리곰탕 재탕 삼탕하며 몸보신을 해야겠다.
다음날 어제 집에 초대해서 커피를 대접했던 마리에게서 저녁 8시 반에 자기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다. 하루쯤 이란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같이 식사하면서 소소한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반갑고 좋은 초대였지만 너무 늦어 그 다음날 일정에 차질이 있을 것 같아 아쉽지만 응하지 못했다. 이란 사람들은 저녁을 늦게 먹는다고 한다.
이란 여자들의 히잡 쓰는 모양새를 보며 우리 고교시절 모자 쓰는 모양새를 떠올렸다. 당시 범생이들은 이마까지 모자를 당겨서 반듯하게 쓰고 다니고 불량기가 있을수록 모자가 뒤로 젖어지게 쓰고 다녔다. 아마 나도 모자를 뒷머리의 2/3 정도에 걸치고 다닌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이란 여자들의 히잡이 꼭 그렇다. 젊고 멋쟁이일수록 히잡은 뒤로 젖혀져있다. 심한 여자들은 거의 뒷머리의 포니데일에 걸쳐져 있다. 그것 때문에 부모들에게 잔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쯔쯔” 참고로 이 관용구는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와 있다고 하니 어른들이 보는 젊은이들은 늘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르지 않은 인류의 보편적인 모습인가보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에서는 모든 여성에게 히잡 쓰기가 강요되어왔다. 그 전에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쓰게 해달라고 데모를 했다. 샤 레자 필레비 국왕이 히잡 착용을 금지하였었다. 친미 팔레비 왕조는 서구식 복장 문화에 관대해서 한때 이란 여성들은 미니스커트 열풍이 지나가기도 했다. 이제는 히잡을 강요하니까 히잡을 벗을 권리를 위해 데모를 한다.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안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쓰든 말든 선택할 자유를 달라고 외치고 있다. 이란에서는 히잡을 벗고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미투’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자칫 따분할 수 있는 이슬람에 대하여 같이 공부 좀 해보자고 여자들의 히잡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슬람은 오늘날 유라시아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담론(談論)이다. 중국의 서쪽, 유럽의 동쪽, 러시아의 남쪽, 인도의 북쪽, 중앙아시아가 모두 이슬람 문화권이다. 이슬람은 그저 그렇고 그런, 미개하고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이 수용하고 있는 이상야릇한 사이비 종파가 아닌 세계 19억의 인구가 믿는 중요한 종교로서 이해해야 되고, 중요한 문명, 문화로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시대를 선도하며 유라시아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오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이슬람의 여성문제이다. 광활한 사막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다른 부족과의 전쟁 속에서 삶을 이어왔다. 유목민들은 찾아오는 손님을 환대하지만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여자와 아이들은 다른 부족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사고 예방책이었을 것이다. 히잡, 차도르, 부르카 등은 이런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전통이다.
6세기 후반 들어서며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오랜 전쟁으로 실크로드는 길이 막히게 된다. 이때 대상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안전한 통행로로 선호하게 되었다. 이 무렵 메카가 대상무역(隊商貿易)의 중요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우상을 숭배하는 많은 유목 민족이 흩어져 살던 아라비아반도의 혈연적 부족사회 속에서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이슬람의 창시자는 마호메트이다. 그는 부유한 과부 하디자의 대상에 들어가 그녀의 신임을 얻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그는 히라산의 동굴에서 명상을 하다가 가브리엘을 만나 알라의 계시를 전한다.
마호메트는 초승달이 뜬 밤에 신자들을 이끌고 메디나로 가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한다. 그 해가 622년이고 이슬람력의 첫 해이다. 대부분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 초승달이 있는 이유이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라면 이슬람의 상징은 초승달이다. 세계 3대 종교인 이슬람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스마엘, 모세를 거쳐 무함마드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슬람은 마호메트를 최후의 예언자이며 신의 사자(使者)로서 신의 뜻을 가장 완전하게 전한다고 믿는다. 그는 겸손하고 화를 잘 내지 않고 자신의 습관이나 생활방식에 매우 엄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슬람을 굳건히 뿌리내리게 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자질도 있었지만 시대적인 상황도 주요 원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아랍 세계에는 30개가 넘는 베두인(Bedouin) 부족이 서로 반목(反目)하고 싸웠으며 불평등과 무질서가 만연(蔓延)했다.
그는 이런 무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종교를 선택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도움이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했다. 그가 메카에 머물렀을 때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 역할에 그쳤으나 메디나로 이주한 뒤에는 이슬람의 믿음 아래서 사회적 통합을 이룩하려는 정치적 지도자 그리고 군사령관의 권한까지 갖는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메디나의 유다교도들을 몰아내고 63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한다.
이슬람이 어느 순간 나타나 순식간에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 지역은 오랜 전통과 역사가 있는 지역이었다. 문명의 발생지였고 여러 세력의 각축장(角逐場)이었다. 이슬람은 어떻게 보면 이런 문화와 역사의 융합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 세계의 긴 역사 속에서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이면서 세속성과 정치성으로 외연을 확대하였다. 이슬람은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의 살아가는 형태이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이슬람 전통에 따라 합의제로 칼리프를 후계자로 옹립(擁立)해야 한다는 의견과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였던 유일한 혈통인 알리로 이어져야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전자를 수니파라 부르고 후자를 시아파라 부른다. 꾸란은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신의 말씀으로 간주되며, 인간이 의지해야 할 완벽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이슬람교는 종교적 수행을 중시하지 않고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결합해놓은 전형적인 재가 신앙이다. 시아파의 이맘을 숭배하는 것을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성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함께 여는 밝은 미래를 위한 인류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무슬림은 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복종하지도, 다른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예의를 지키길 바랄 뿐이다. 이슬람의 폭력성은 석유 이권을 둘러싼 서구 열강들의 착취에 연유하는 바가 크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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