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오전 9시, (동부시간 10시)에 월마트에서 출발했다. London은 동부시간대에 속한다. 1시간 20분이면 도착할 줄 알았던 런던 월마트는 두 시간 넘게 걸렸다. 국도 최고 속도가 55마일로 제한인데다 가파른 언덕이 많았다.
월마트를 지나 75번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Loves 트럭스탑에서 쉬기 위해서다. 가까운 트럭스탑도 있지만 샤워를 하고 싶었다. 이곳 샤워는 말 그대로 핫샤워였다. 뜨거운 샤워는 좋다. 어떤 곳은 미지근한 물만 나온다.
샤워 후 쉬면서 소설 '삼체'의 진도를 더 나갔다. 읽을수록 흥미롭다.
오후 5시, 리퍼 연료를 채우고 월마트로 향했다. 10시가 넘어 나왔다. 서류를 자세히 보니 클레임이 있다. 요플레 두 종류가 몇 상자씩 모자랐다. 다행이다. 물건이 많거나 파손되면 인수를 하지 않는다. 트레일러에 물건을 남겨 두는데 때로는 이게 처리 곤란이다. 다음 화물 예고가 들어와 있다. 북쪽 방향이다. 남은 시간을 계산해 갈 수 있는 거리 내의 휴게소와 월마트를 검색했다. 클레임 때문인지 다음 화물 배정이 안 들어왔다. 확정이 안 된 상태에서 갈 수는 없어 가까운 트럭스탑에 들렀다. 트럭스탑 주차장은 만차(滿車)지만 옆 서비스 도로 갓길에 몇 대는 주차할 공간이 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그렇게 밤을 샌 적이 있다. 다른 트럭 뒤에 댔다. 예고된 화물은 다른 사람에게 갔거나 내일 들어올 모양이다. 어차피 나는 쉬어야 한다. 낮에 샤워 해두기를 잘 했다.
벌써 12월이라니. 시민권 인터뷰 날짜도 열흘 남짓 남았다. 예상문제 공부해야 하는데 삼체 때문에 뒷전이다. 영어 이름으로 변경하는 문제는 현재 이름을 그냥 쓰는 쪽으로 마음이 가고 있다.
내가 페북에 어울리지 않는 긴 글을 매일 쓰는 이유가 있다. 글쓰기 근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글쓰기는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다. 프로 마라토너는 일반인이 전력 질주하는 속도로 두 시간 이상을 꾸준히 달린다. 내가 전력 질주하면 1분 정도는 프로 마라토너처럼 뛸 수 있다. 속도는 글의 질에, 거리는 글의 분량에 해당한다. 온종일 몇 문장을 붙들고 씨름하면 프로 작가 수준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줄줄 써나가면 오타에 조악(粗惡)한 문장이 나온다. 이래서야 채산성이 없다. 프로작가는 수준급의 문장을 줄줄 써낼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나는 글만 쓰는 프로작가도 아니다. 일하는 틈틈이 글을 써야 한다. 지금은 질보다는 양에 치중하는 편이다. 많이 써야 글쓰기 근육이 붙기 때문이다. 문장을 가지고 노는 것은 그 다음 단계다.
그래도 지금껏 거의 매일 일기처럼 쓸 수 있었던 것은 페이스북에 올렸기 때문이다. 내 글을 재미 있게 읽어 주는 사람들이 있고 트럭킹 관련해서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는 사람도 있다.
나 자신을 관찰하고 글을 통해 객관화시켜 봄으로써 일에 매몰(埋沒)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 기록들이 모여 언젠가는 트럭커로 새 삶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이드 역할도 할 것이다.
생각의 순도(純度)
요새는 일기가 하루만 밀려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이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뭘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를 판이다.
일요일인 2일 아침 켄터키 주 런던의 트럭스탑에서 출발해 인디애나 주 앤더슨으로 향했다. 중간에 블루 비콘 트럭세차장에 들렀다. 세차장 출입구가 고속도로 진입로와 가까워 고속도로로 잘 못 들어갔다. 한 십여 마일을 다시 돌아서 왔다.
앤더슨에 도착하니 네슬리(Nestle) 공장이었다. 화물은 아이스크림에 들어가는 원료가 아닌가 싶다. 배달처는 오클라호마 주 터틀(Tuttle)의 Braums Dairy Plant다. 900마일 가까운 거리에 모레 오전 7시에서 오후 2시 사이 배달이다. 화물은 2만 파운드가 안 됐다.
약 190마일 떨어진 일리노이 주 에핑햄(Effingham)의 Flying J 트럭스탑에서 중간 급유를 하게 돼 있다. 에핑햄은 교통 요지라 네이슨과 수련하면서 몇 번 가 봤을 것이다. 에핑햄에는 대형 트럭스탑이 밀집해 있다. 이곳 Flying J도 150대 규모의 큰 곳이다. 오후 5시 즈음에 도착했는데 자리가 많았다. 아직 두 시간 정도 더 갈 수 있지만 여기서 쉬기로 했다. 주유는 내일 출발할 때 하기로하고 주차부터 했다. 일부러 가장 먼 곳을 택했다. 한산하기도 하거니와 걷는 운동을 조금이라도 더 할 요량이었다. 네이슨도 항상 그렇게 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 저녁에 샤워도 하고 일기도 써야지 했는데 새벽까지 계속 잤다.
3일, 월요일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샤워부터 했다. 트럭스탑 규모가 큰 만큼 샤워실이 15개가 있었다. 작은 트럭스탑은 서너 개 밖에 안 되는 곳도 있다. 오늘은 주유 결제를 모바일 앱으로 해봤다. 주유 펌프 단말기에서 입력하는 대신 모바일 앱으로 정보를 입력하는 방식이다. 모바일 앱으로 하면 갤런당 4포인트 받는 것을 5포인트 받을 수 있다. 러브스 트럭스탑은 3포인트를 준다. 다른 곳은 1포인트다. (이렇게 모은 포인트로 산 가민 GPS를 네이슨은 내게 줬다)
오늘은 종일 흐렸다. 흐린 날이 운전에는 더 좋다. 눈이 부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10시간 가까이 달렸다. 목적지까지 100마일 남은 지점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멈췄다. 40마일 더 가면 Flying J 트럭스탑이 있지만 70대 규모의 중급인데다 오클라호마 시티 인근이라 자리가 없을 가능성이 있다. 시간 여유가 있는데 굳이 무리할 필요 없다. 100마일 이내면 적당한 거리다. 내일 새벽 5시에 출발할 예정이다. 일찍 시작하고 일찍 끝내는 편이 역시 좋다.
이 고속도로 휴게소는 도로 왼편에 입구가 있다. 그러니까 휴게소 자체는 상하행선 가운데 있다. 이런 경우 보통은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없게 돼 있는데 여기는 뚫려 있다. 휴게소에서 유턴이 가능한 셈이다.
트럭을 운전하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옛날 기억부터 현 시국 정세, 철학적 논제, 작품 아이디어, 공상 혹은 망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생각을 비우는 연습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항상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지 않을 뿐이다. 가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운전 삼매에 들기도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이 하는 생각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생각은 행동을 촉발한다. 그렇기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되도록 의미가 있거나 즐거운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내 생각의 순도는 얼마나 될까? 신의 경지를 100으로 치자면 80% 이상은 붓다나 예수급의 해탈자, 50% 이상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 성인급이 아닐까. 30% 이상이 되면 철학자나 위인급일 것이다. 보통의 현대인은 5%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머지 시간은 잡생각으로 찼다. 원망, 시기, 분노 등 해로운 생각만 안 해도 다행이다.
그렇다고 5%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5%의 순도를 가진 생각이라도 자꾸 모으고 정제를 하면 보물이 된다. 사금 캐듯 말이다. 사금을 캐기 위해 모래를 뜨면 금은 0.1%도 안 될 것이다. 그래도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작은 금알갱이를 모아 녹이면 커다란 금덩이가 된다.
쓸모없는 생각을 버리고 가치 있는 생각을 자꾸 하면 내 인생이 금덩이로 바뀌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점차 생각의 순도도 높아져 의식이 성장하고 잘하면 깨달음의 경지에도 이르지 않을까.
나는 트럭 운전을 시작하기 오래전부터 어떤 비전을 반복해서 봤다. 이른 아침 동틀녘 하이웨이를 달리다 불현듯 각성(覺醒)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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