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22] 북경서 우여곡절 끝 43년 만에 북한으로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기자 주)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북한의 부모님이 나를 애타게 찾고 계신다는 소식을 캐나다 거주 동포로부터 듣고 온 다음날부터 나는 며칠을 앓았다. 꾹꾹 눌러두었던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면서 시도 때도 없이 부모님과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구실 창밖으로 낙엽이 흩날리는 광경을 보노라니 고향집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문득 어릴적 왼종일 산야를 싸돌아다니며 정신없이 놀다가도 어두어둑 날씨가 추워지면 냅다 집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더 추워지기 전에 북한을 방문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는 광고가 1년 전쯤 실린 것이니 그 동안에 북측의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990년 10월 어느날,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전에 세차례나 중국을 방문했지만, 이번 방문은 세미나 보다는 북한방문이 목적이었던 만큼 발걸음이 편치가 않았다.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오랜 친구이자 쾌남 인상의 북경대 교수가 나의 얘기를 듣더니 “도울 수 있는 껏 돕겠으니 반드시 소원을 풀라”고 격려해 주었다. 북경에 북한 대사관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나는 그 친구의 도움으로 대사관 주소를 알아냈고, 도착한 다음날 아침 택시를 잡아 타고 북한 대사관으로 갔다. 북한 대사관 앞에 도착하니 북한 군인으로 보이는 경비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건물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학교 건물이었던 듯 얼핏 보기에 규모가 커 보이는 건물이 널따란 운동장 저 편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택시 운전사에게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한 시간 후에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북경대학의 내 친구를 찾아가서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전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대사관까지 나를 싣고 온 비용은 물론 북경대학까지 가는 택시 비용까지 합한 금액의 반절을 주며 “나중에 대사관에서 내가 무사히 나오면 나머지 반절을 주겠다”고 했다. 눈치를 챈 그는 흔쾌히 “알았다”며 나를 내려 주었다.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낮게 헛기침을 한 나는 정문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북한 경비병에 다가섰다. 저만치에서 차를 내릴 때부터 나를 지켜보던 그가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내게 물었다. “왠 일로 왔습니까?” “내 고향은 북한 양강도 후창입니다. 가족들이 나를 찾는다기에 북한을 방문하러 왔습니다.” “초청장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여기에 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여기 부모님들이 나를 찾는다는 증명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초청장을 받을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좀 알려주시오” 그는 내가 내밀은 신문광고지를 잠시 살펴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초소 안으로 들어간 경비병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듯했다. 10여분쯤 지나 그가 다시 나오더니 문을 열고 손짓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발걸음 옮겨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북한 영토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니 잠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휑댕그레 텅빈 운동장을 한참 걸어들어가니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 버티고 있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사무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내게 “초청장이 있느냐”고 묻기에 들고간 광고지를 내밀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대번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상관인 듯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장 차림의 남성이 긴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접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는 그가 내 사정을 알고 왔으리라는 짐작으로 닥아가서는 신문 광고지를 내밀었다. 신문에 난 광고를 살펴보던 그가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략 무슨 사정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처럼 개인적으로 조국을 방문하겠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단체로 우리 정부의 초청을 받아 가는 경우라면 모를까 이런 경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나는 세계 굴지의 미국 제약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고향을 방문하여 부모님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간청을 듣던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일단 당신과 같은 방문 사례가 없어서 내가 어찌해 볼 사안은 아닙니다. 일단 평양으로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오늘 돌아가서 기다리시면 가부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한밤중에 온 전화 “내일 정오에 평양행 비행기 타라” 간단하게 해결되리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지만, 북한을 방문하는 길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 초조해 졌다. 그러나 기다려 보기로 하고 일단 호텔에 짐을 풀었다. 싱가포르에서 세미나가 열리기 까지는 열흘이 조금 넘는 시간이 있으니 그 안에 무슨 좋은 소식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북경대학 교수와 함께 오전 세미나가 끝난 후에는 여기저기 관광을 다녔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기에 북한 대사관에 전화를 했더니 “아직 소식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직원이 말하기를 “불가하면 즉시 초청 거부 연락이 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보아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하루를 더 지나고도 소식이 없어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좋은 소식이 있으면 즉시 연락해 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며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12시 막 잠이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축하합니다 선생님, 평양에서 초청 허가가 나왔습니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대사관으로 나오십시오.” “그런데, 오전 10에 나와서 뭘 해야 합니까?” “예, 평양행 비자 수속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북한으로 떠나지요? “두시간 후에 가게 됩니다.” “예?, 비자 받고 두 시간 후에 떠난다구요?”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난 나는 우선 북경대학 교수 친구에게 북한에서 초청허가가 나왔고, 내일 당장 떠나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놀라기보다는 축하 인사를 먼저 했다. 북경대학 교수 친구와 나는 부랴부랴 중국항공사와 미국항공사 지점을 찾아가서는 나의 싱가포르 세미나 여행 일정을 조정했다. 당시 중국인들의 ‘만만디’ 일처리로 속도로 보아 인맥과 정부기관 파워를 갖고 있었던 교수 친구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두어 시간 만에 비행 일정을 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감으니 16세때 동네 한켠을 휘돌아 산 골짜기로 이어졌던 후창강가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마치지 못한 공부를 계속하라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장남을 떠나보내시던 표정과, 트럭에 오르는 나를 보며 어서 가라고 손짓하던 모습이 교차되어 나타났다. 그 어머니는 1년 후에 내가 인편으로 보낸 교복사진을 보고 ‘우리 아들 일류고등학교 들어갔다’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을 것이고, 3년 후에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아들 살려달라’고 날마다 정안수 떠놓고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장남 꼭 돌아올 것’이라며 아랫목에 밥 묻어놓고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림에 지쳐 삭을 대로 삭아버린 속내를 다스려 오며 사십년을 흘려 보낸 어느날,<노동신문>에서 ‘해외에서 조국을 빛내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한도원'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며칠을 앓아 누우셨을 것이다. “내년 여름 방학하면 돌아오겠다”고 떠난 아들이 43년이 지난 후에 ‘이름’으로만 돌아온 것을 보고 우선은 기쁨에 북받쳐 우셨을 것이고, 당장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만져볼 수 없는 그리움에 겨워 우시다가 자리에 누우셨을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 어머니에게 “어머니, 내 여기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그러며 대문칸을 들어서려고 고향에 가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 출구에 나타난 남자… 불안하기만 했다 갖가지 상념에 잠기다 창밖을 내다보니 북녘땅이 저만치 아래로 비켜 들어왔다. 바다인지 강인지 저편으로 건물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들거리며 들쑥 날쑥 눈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착륙했다. 간단한 캐리온 백 하나를 끌며 막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왠 남자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바람에 움칫 놀래며 발걸음을 멈췄다. “한도원 박사님이시죠? 조국에 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누구시죠?’ “예, 한 박사님을 모시기 위해 나온 사람입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키가 홀쭉하고 옷매무새가 말쑥해 보이는 그 남성은 정중한 태도로 입국심사대가 있는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듯 심사관은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이 건네준 초청장과 내 여권을 보더니 입국도장도 찍지 않고 통과시켰다. 이런 수속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고 너무 간단하여 무슨 일인가 싶어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다. 남자는 비행장 출구 한쪽 한적한 곳을 향해 여유있게 앞서 걸어가며 나를 안내했다. 밖으로 나서니 거기에는 검은색 벤츠 차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미모가 출중한 여성이 차 문을 열고 다소곳한 자세로 나를 맞이했다. 그들은 검은색 벤츠 뒷좌석에 나를 앉히고 여자는 앞좌석에 앉도록 했다. 그들은 정중하게 대하고 있었으나 나는 불편하기만 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성은 자기를 소개하기를 나를 환영하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나온 공무원이라고 했고, 여성은 북한에 있는 동안 나를 안내할 안내원이라고 했다. 불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먼저 내가 침묵을 깼다. “나는 가족들을 만나러 북에 온 사람입니다. 언제 내 가족들을 만나게 되지요?” “아 예, 호텔에 가셔서 먼저 저녁 식사를 하시게 됩니다. 그 자리에 높은 분이 오는데, 그때 만나시면 알게 됩니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불빛이 연신 곡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벤츠는 포장 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북한 당국은 미리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호텔에서 기다려야 하는 사람은 북한 고위관리가 아니라 가족들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평양의 첫날, 부모 형제들이 있는 고향에 돌아왔다는 기쁨보다는 어색함과 막연한 두려움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과 마주쳐야 했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구성 : 김명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