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NSW 노동당을 이끌며 노동당 역사에 최고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던 네빌 랜(Neville Wran) 전 수상이 지난 일요일(20일) 오후 6시 타계했다. 사진은 수상재임 시절의 랜 전 수상.
20일(일) 오후 6시, 향년 87세... 2년간 치매 앓아
정치 시련기 “발메인 소년은 울지 않는다” 명언 남겨
지난 1970년대와 80년대 NSW 주 수상을 지냈던 노동당의 우상 네빌 랜(Neville Wran) 전 수상이 지난 일요일(20일) 오후 6시 별세했다. 향년 87세.
지난 2년간 치매로 특별 치료를 받아오던 랜 전 수상은 이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이날 랜 전 수상의 부인인 질 힉슨(Jill Hickson) 여사는 랜 전 수상의 사망을 발표하는 성명에서 “우리 모두에게 슬픈 시간”이라며 “하지만 네빌에게는 축복의 시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힉슨 여사는 이어 “치매는 잔인한 운명이고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그로 인한 손실을 비통해 했다”면서 “하지만 나는 지금 정치 풍토에서 사람들이 정치적 영웅이었던 위대한 한 인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 함께 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1976년 5월부터 1986년 7월까지 주 수상직을 맡았던 랜 전 수상은 재임 시절 로또 도입, 지방정부에 대한 ‘rate-pegging’, 자동차 운전자에 대한 불시 알코올 호흡 테스트, 환경법원, ‘consenting adult’(법적으로 성 관계 동의 결정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연령의 성인)의 동성애 법안 등을 도입했다.
또한 재임 시절 현재의 달링하버 재개발에 착수하고 시드니 엔터테인먼트 센터(Sydney Entertainment Centre)를 건설했으며, 특히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자랑할 만한 것으로는 국립공원을 지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애보트(Tony Abbott) 연방 수상은 랜 전 수상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 월요일(21일) 아침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사 중 하나”라고 지칭하면서 NSW 주는 물론 호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라고 평했다.
며칠 전 사임한 오파렐(Barry O'Farrell)의 뒤를 이어 수상직을 맡은 마이크 배어드(Mike Baird) 현 주 수상 역시 “랜 전 수상의 사망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배어드 수상은 “70-80년대 랜 전 수상은 NSW 노동당에서 빼어난 인물이었다”며 “그의 업적은 긍정적이었으며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랜 전 수상의 뒤를 이어 수상에 오른 봅 카(Bob Carr) 전 수상 또한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며 “우리는 그의 지도력, 재담, 앞을 보는 전망 등을 통해 정치능력을 키웠다”고 말했다.
카 전 수상은 이어 “랜 전 수상은 그 자신의 재임 시절 가장 큰 업적으로 80년대 초 열대우림을 보호한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고 회상하면서 “이는 다른 주 노동당 정부의 환경문체 처리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노동당의 빌 쇼(Bill Shorten) 대표 또한 “호주 노동당은 거인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쇼튼 대표는 애도 성명에서 “랜 전 수상만큰 참신하고 존경할 만한 이는 몇 안 될 것”이라며 “그는 정치에서 NSW 주 최고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항상 겸손한 초심을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랜 전 수상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NSW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된다. 발메인(Balmain)의 노동자 가정에서 자란 랜 전 수상은 자기 노력으로 법정 변호사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 ‘Nifty’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70년 43세의 나이에 상원 의원으로 지명돼 정치에 발을 디딘 그는 3년 뒤 시드니 서부 바스 힐(Bass Hill)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 본격적인 의정 활동을 시작했다.
1976년 정치적 지지도가 낮아져 벼랑 끝에 몰린 NSW 주 노동당 대표직을 맡은 그는 2년 뒤 선거에서 거의 58%에 가까운 지지도를 얻어 노동당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다.
3년 뒤인 1981년 선거에서도 그는 다시 자유-국민 연합을 크게 눌러 승리했으며 개인 지지도에서도 월등한 인기를 확보, 차기 연방 수상(Prime Minister)으로까지 언급되기도 했다.
수상재임 시정, 그의 정부는 80년대의 첫 번째 공무원 파업, 끊임없는 경찰, 사법부, 정부의 부정 의혹을 견뎌야 했다. 이런 의혹은 ABC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Four Conners’가 랜 전 수상이 법정 판결에 개입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NSW 노동당의 최대 위기였다.
이때 랜 전 수상은 NSW 노동당 전체 회의에서 “발메인의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러면서 그는 “당신이 핀으로 우리를 찌르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과 똑같이 피를 흘리게 된다”고 덧붙였다. 부정 의혹에 대해 떳떳하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말이었다.
결국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는 랜 전 수상에 대해 ‘혐의 없음’을 판결했지만 그와 언론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돼 있었다.
이어진 1984년 선거에서 또 다시 자유당을 눌렀지만 노동당 지지도는 이전 선거 때보다 크게 낮아져 있었다.
비록 선거에서의 지지도가 낮아지기는 했지만 13년간의 NSW 노동당 대표로 한 번도 선거에서 패한 적이 없고 또 보궐선거에서도 진 적이 없는 랜 전 수상은 1986년 갑작스레 사임을 발표, 그의 지지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