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마트와 흉노시대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흑해 북부연안에서 후기 스키타이 문화가 번창한 기원전 4세기 경, 카스피해 북방 초원에서는 새로운 유목민 세력이 발흥하고 있었다. 이른바 ‘사르마트’라 불리는 집단이 그들이다. 그곳에는 이전부터 ‘사우로마트’라는 유목민이 있었음을 헤로도투스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바로 그들과 카자흐스탄 방면에서 온 다른 집단이 합쳐져 사르마트가 되었던 것 같다. 사르마트 역시 스키타이처럼 이란 계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마트는 지금의 카자흐스탄 아티라우 근처인 우랄 남부에서 서쪽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여 기원전 2세기에는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스키타이를 몰아냈다. 이에 일부 스키타이 집단은 크림 반도 남부와 도나우 강 하구 부근으로 들어갔다.
사르마트의 지배계급은 스키타이 처럼 대형무덤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 무덤에는 로마와 중국에서 들어온 수입품 또는 그 모조품(특희 거울)이 발견되었다. 문양으로는 중국의 용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장식 요소는 초원지대 동부의 흉노와 중앙아시아 북부 유목민의 손을 거쳐 전해졌을 것이다. 하여튼 사르마트는 그 당시 대국인 중국과 파르티아(중국사서에는 ‘안식국’으로 표기: 실크로드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무제 이후 활발해진 동서교역 특히 중국비단의 중계무역을 독점했다), 로마와도 교류하고 있었다.
흉노의 발흥과 융성
스키타이와 동시대인 기원전 8~4세기에 몽골 고원에서 중국 북부에 이르는 중앙유라시아 동부 초원 지대에서도 스키타이와 똑같은 무기와 마구와 동물 문양을 소요한 문화가 번창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문화를 남기 사람들을 중구 사서의 ‘산융’ 또는 ‘적’과 결부시켜 보기도 하지만, 그들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어떻든 이 시기 초원 지대 동부에서는 크고 작은 부족들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할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급속히 통일을 향해 가던 기원전 3세기 후반, 마치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북방 초원에서도 통합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몽골 고원 동부에서 서부에 걸쳐 정립하고 있던 동호, 흉노, 월지 가운데 흉노가 다른 두 집단을 제압하고 기타 군소 세력까지 규합하여 역사상 초유의 큰 정치 세력을 수립했다. 중국사서에서는 이 일을 담당한 사람을 묵특선우라고 기록하고 있다.
‘묵특’이라는 이름은 몽골어 ‘바투르’(즉, 용사)를 음사한 말이다. ‘한서’에 의하면 “흉노 군주의 칭호인 선우는 ‘탱리고도선우’의 약칭으로 탱리는 하늘, 고도는 아들, 선우는 광대함을 뜻한다”고 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탱리’를 고대 투르크-몽골어에서 하늘을 의미하는 ‘텡그리’로 보고 있다. 북아시아 유목민과 수렵민은 천신을 최고신으로 여기는 샤머니즘을 신봉했는데, 흉노의 군주는 스스로 하늘의 아들이라 칭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배력을 일반유목민의 정신세계에 미치려고 했다.
흉노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제사의식은 나무 또는 버드나무 가지를 세워 만든 제단을 세우고 그 주위를 돌면서 신을 불러내고 천지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흉노인들은 1년에 봄과 가을 2차례 번영을 기원하며 경마와 씨름을 즐기고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이와 함께 이 제사때에는 여러 부족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하고 국사를 토의했으며 과세의 기초인 인구와 가축수를 헤아렸다. 아마도 새로운 선우도 이러한 회의를 통해 선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묵특선우 치세기에는 선우 권력이 워낙 강대해 족장회의가 형식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목민 흉노의 풍속은 정주 사회 거주민들 눈에 매우 기이하게 반영되었다. ‘사기’ <흉노전>에는 한나라 사신과 흉노 고관 중항열 사이에 주고 받은 흥미로운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사신이 “흉노는 노인을 업신여긴다”고 비난하자, 중항열은 “흉노에서는 전쟁이 중요하기 때문에 싸우지 못하는 노약자는 뒤로 미루고 먼저 건장한 사람에게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게 한다. 그렇게 하여 전쟁에 이기면 노인도 그의 자식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에 한나라 사신이 “흉노는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천막에서 잠자고, 아버지가 죽으면 계모를 처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위계에 상응하는 복식도 없고 궁정의 의례와 제도도 없다”고 비판하자 이에 중항열은 “흉노는 가축과 함께 생활하고 계절에 따라 이동한다. 법규가 간소해 지키기 쉬우며 군신 관계도 단순하다. 한 국가의 정치는 한 인간의 신체와 같다. 부자와 형제가 죽으면 그 처를 취하는데 이는 혈육을 잃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겉치레만 하고 실제로는 친족을 서로 살해하고 있다. 흉노에는 그러한 허식적인 의례나 복식이 없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 대화는 사마천의 선입견이 담겨 있는데, 유목사회와 정주사회의 윤리가 확실히 다르다는 점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대목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