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하여 파리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오스카 와일드(1854~1900년)의 삶과 문학, 예술관을 재조명하는 기획전이 파리 샹젤리제에 인접한 쁘티팔레 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 세기의 무뢰한(Oscar Wilde, l’impertinent absolu)’이라는 테마로,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작가의 모든 것이 공개된다.
‘모든 예술은 전혀 쓸모없다’, ‘예술의 목적은 아름답고 거짓된 것을 말하는 데에 있다’는 등 와일드의 유명한 도발적인 글들과 더불어, 그의 수채화, 데생, 이태리 피렌체 여행스케치를 시작으로 전시회는 진행된다. 어린 시절의 꿈과 이상향을 표현한 아일랜드 시골풍경화에서는 작가의 정서적 평정과 심리적 안정감이 고스란히 흘러나온다.
와일드가 런던에 정착하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던 1877~1879년대 그로스베너 화랑의 화폭들도 그의 평론과 더불어 그대로 재현된다. 미국인 사진작가 나폴레옹 사로니(1821~1896년)의 일부 작품들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선보인다. 와일드는 1882년 뉴욕으로 건너가 강연과 현지작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명성을 얻으며, 이때 사로니는 상승세를 보이는 작가의 오만함과 긍지심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표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0년)’과 ‘살로메(1893년)’를 포함한 와일드의 주요 시집의 자필원고,어머니 혹은 프랑스 작가들과 주고받은 편지, 데생, 풍자만화, 삽화 등도 다양하게 전시된다. 또한 와일드가 1895년 런던에서 동성애 혐의로 재판받는 기록, 그를 구제하기 위한 탄원서, 동성애의 증거물로 채택되었던 알프레드 더글러스(1870–1945년)에게 보낸 서신들도 이번 전시회를 통해 공개된다.
1945년과 1970년 영화로 각색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마지막 장면이 비디오를 통해 상영된다. 이뿐만 아니라 전시장 천장에서 바닥으로 투영되는 영상을 통해 1923년, 1953년, 2011년 각각 각색된 전설적인 ‘살로메’의 매혹적인 춤을 감상할 수 있다. 예술가들의 영감에 따라 데생, 삽화, 그림으로 구현한 살로메의 다양한 모습들이 소개된다.
▶ 파리를 사랑했던 시인, 와일드
와일드가 파리에서 빅토르 위고, 폴 베를렌느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883년이다. 프랑스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던 와일드는 파리 문인들과 풍요로운 교류를 가졌고, 서로 간에 깊은 영향력을 주고 받았다.
와일드의 삶과 예술세계를 보자면 보들레르와도 흡사한 분위기를 지닌다. 사실 그는 파리에 도착하기 전에 보들레르를 즐겨 읽었다. 상징주의 시인으로서 보들레르의 후배인 말라르메는 파리 8구 자택에서 화요일 저녁마다 시인, 작가, 예술가들과 모임을 가졌으며, 와일드도 이 화요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출판하자 가장 먼저 말라르메에게 기증했고, 시인은 이 소설을 극찬했다.
1893년 와일드는 ‘살로메’를 불어로 집필하며, 원고 교정은 탐미파 시인 피에르 루이스(Louÿs, 1870-1925년)가 담당했다. 에밀 졸라의 ‘나나’, 보들레르의 ‘악의 꽃’, 플로베르로부터 영향 받은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와일드는 평소 좋아했던 연극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살로메 역을 맡아 런던무대에 오르기를 기대했지만, 그의 생전에 상연 금지라서 영국에서 공연을 갖지 못했다. 반면 파리에서 1896년 2월11일 초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무뢰한’
1897년 5월 와일드는 영국감옥에서 풀려나자 프랑스행을 선택, 노르망디 디에프에 정착한 후 새로운 필명으로 집필활동에 들어갔다. 1898년부터 파리 6구 보자르 거리(13 rue des Beaux-Arts) 싸구려 호텔에 체류했으나, 파리문단에 컴백하지 못하고 세상의 냉대와 빈곤, 병마와 시달리며 이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와일드는 지인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요청했지만, 세상의 이목이 두려웠던 일부 작가들은 그를 외면했다. 특히 앙드레 지드(1869~1951년)의 경우는 당대 파리문단에서도 화제가 됐다. 당시 지드와 와일드의 동성애 소문이 파리문단에 은밀하게 나돌았던지라, 지드의 와일드에 대한 냉정함에 눈총을 보낸 작가들도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가로서 최고전성기는 1890년에서 1895년 사이로 꼽는다. 앙드레 지드가 피에르 루이스를 통해 와일드를 만난 것은 1891년. 와일드 37세, 지드 22세였다. 문학청년 지드는 첫눈에 멋진 와일드의 휘광에 매료되고 말았다.
지드는 1895년 1월 알제리 여행에서 와일드와 동성애를 경험한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해 1월 31일 와일드는 소송준비로 런던으로 되돌아갔고, 알제리에 계속 머물던 지드와 더글러스는 2월 4일부터 19일까지 비스크라에서 함께 체류했다. 이후 평판이 두려웠던 지드는 혼자 프랑스로 돌아오며, 더글러스와1897년 3월까지 서신교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앙드레 지드가 경제적 곤란에 빠진 와일드에게 적어도 한번 정도는 돈을 빌려줬다는 기록은 남아있다.와일드는 1898년 12월 10일자 편지로 지드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12월 12일자 서신에서는 지드를 향한 원망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지드가 도움을 거부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어서 12월 14일자에서 200프랑을 빌려준데 대해 지드에게 고마움을 전달했다. 이후 지드도 인간이었던지라 세상사의 질타로부터 몸을 숨기고 싶어 와일드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와일드는 지속적으로 지드의 삶과 작품세계에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와일드는 강제노역에서 얻은 병마로 인해 1900년 46세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가 체류했던 ‘알자스’ 호텔은 오늘날 ‘오스카 와일드’로 간판이 바꿔졌고 파리의 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 현재 와일드는 파리 20구 페르 라쉐즈(Père Lachaise)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동시대인들보다는 후세에게 더 사랑받는 작가로 떠오르고 있다.
▶ 멋쟁이 댄디(Dandy) 작가
이번 쁘티팔레 기획전에 전시된 초상화나 사진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면, 와일드와 더글러스를 포함한 모든 남성들이 한결같이 세련된 복장과 세심하게 몸치장한 멋쟁이들이라는 점이다. 전시장 한 벽면을 차지하는 젊은 앙드레 지드의 대형 초상화를 보자면 할리우드의 미남배우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멋지고 우아한 모습이다.
당시 멋을 중요시 여기는 ‘댄디이즘’이 풍미한 시대였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문학계에서는 이미 발자크(1799~1850년) 시대부터 작가라는 이미지에 세련된 멋쟁이라는 개념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색채와 유행에 민감한 작가, 시인들이 시대를 한발 앞서가는 멋을 선도했다. 이들은 양복, 넥타이, 장갑, 구두, 모자, 지팡이 등 멋진 장신구 구입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로 인해 발자크는 재정적으로 파산을 맞기까지 했다.
맵시 좋은 의상이나 장신구를 걸쳤다 해서 무조건 댄디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격조 높은 말솜씨, 미소,몸짓도 멋쟁이 댄디 작가가 지녀야 할 중요한 조건이었다. 특히 댄디이즘을 추구하던 가난한 작가나 예술가들은 재치와 유머감각, 배짱, 정신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면 어느 상황에서든지 진정한 멋쟁이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구현했다.
바로 런던에 도착한 젊은 와일드의 경우이다. 그는 영국 상류사회와 문학살롱을 출입하고 싶었지만 무일푼 빈털터리였다. 멋쟁이 런던신사들 사이에 낄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넝마차림으로 상류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에 톡톡 튀는 배짱과 개성, 유머감각, 고품격 어법구사와 말투, 대화능력으로 문턱 높고 오만한 런던 사교계를 매료시켰다. 값비싼 고급 양복을 구입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존 댄디이즘에 반발하는 넝마차림 전위작가로 행세했던 것이다.
장발의 탐미주의자 와일드는 1883년 파리에 체류하면서 머리는 짧게 깎고 옷차림도 파리패션의 세련된 우아함을 구가했다. 이때 그는 드가, 피사로와도 교류했다. 오늘날 오스카 와일드는 댄디이즘을 추구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나 작가 중에 한 명으로 꼽는다.
150cm 단신에 불구라는 신체적 콤플렉스를 역시나 정신력으로 당당하게 이겨냈던 물랭루즈의 화가 툴루즈-로트렉 역시 와일드의 댄디이즘에 무심하지 않았다. 이번 기획전에 출품된 화폭들 중에서 툴루즈-로트렉의 대형화폭(285 x 307cm) ‘무어춤(La danse mauresque ou Les Almées)’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1895년 물랭루즈의 유명한 무희 라굴뤼(1866-1929년)가 트론 놀이축제행사(La Foire du Trône)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관람객 중에 검은색 탑햇 모자와 정장차림에 등이 넓은 멋쟁이 신사가 바로 오스카 와일드이다. 이 화폭을 위해 와일드가 툴루즈-로트렉의 모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화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화폭으로, 와일드의 댄디 복장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해마다 파리 12구 뱅센느 숲에서 열리는 트론 놀이축제는 957년부터 개최되는, 유럽에서 가장 큰 축제행사로 간주한다. 지금 샹젤리제로 나서면 현란한 크리스마스장터가 연말연시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는데, 바로 트론 놀이축제의 행사 주관자가 떠맡는 축제행사이다.
평소에도 쁘티팔레는 샹젤리제로 나들이 나온 파리지엔들이 무료로 개방된 상기 전시장을 둘러보고 친구도 만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안락한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학, 미술, 사진, 음악, 무용,영화가 총집결된 풍성한 오스카 와일드 기획전과 더불어 축제분위가 고조되는 샹젤리제에서 저무는 한해를 만끽해볼 수 있다.
Petit Palais 기획전
‘오스카 와일드, 세기의 무뢰한 (Oscar Wilde, l’impertinent absolu)’
기간 : 2016년9월28일~2017년1월15일까지 (월요일 휴관, 금요일 21시까지)
입장료 : 10유로
【한위클리 / 이병옥 ahparis@hanmail.net】